사순절 끝자락
비, 황사로 한 주일 가고
대관령, 한계령 같은데 눈이 내렸다지만
오늘 아침 하늘이 너무 예쁘다.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내게로 온다
1. 황무지 (The Waste Land)
사무실 이전하는 바람에 버스 타고 출퇴근하게 되니까
아침저녁으로 한강을 건너고 여의도 돌아가는 버스에 몸 싣고 꽃 사태도 목격한다.
{‘汝矣’가 뭐야? 너네?
(나 아닌 건 모두 너, 그렇게 toi et moi로 가르자고? 吾等과 汝等으로?)
넘쳐흐르는 꽃들, 저렇게 맘대로 내지르고 쏟아지니 ‘如意’라 해라.
흠, “여기서는 맘대로”라는 如意島가 어디에 정말 있을까? 거기에 가고 싶다.}
표어정치와 다이제스트 문화에 젖어 사니까
엘리옷을 읽지 않은 채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그랬다고 흉볼 사람도 없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길러내는 게 어떻다고?
회상과 욕망을 뒤섞는다는 게 뭐 그리 안 통할 이유라도?
죽음의 향기를 피울 히아신스 구근에서 생명이 자라는 게 뭐가 이상해?
난해시라니, 쯧쯧, 가장 선명한 것을.
사순절(Lent - '봄‘이라는 뜻)과 부활에 대해 들은 바 없더라도
‘Man of La Mancha’를 흥얼거리지 못한다 치고
“나 죽고 싶어”라는 라틴어, 헬라어 낙서로 시작하는 게 눈꼴사납더라도
무슨 희랍신화 같은 것들 주저리주저리 읊지 못하더라도
“April is the cruelest month”라는 게 뭐 그리 어렵겠어?
뼈가 갈라져 싹이 나고 생살 찢어져 꽃 피우고
살아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주검을 먹고 기운차려 죽도록 살아가며
죽을 때까지는 죽어가며 사는데
그게 뭐 어떻다고?
여의도도 그렇지만 저 난지도(蘭芝島) 말야,
{내가 한동안 샛강 앞에서 살았다 아이가?}
오리 많고 풀 많던-우와, 蘭芝라니...- 섬에 쓰레기 쌓이더니
그렇게 만들어놓은 산에 월드컵경기장과 하늘공원 생기지 않던가?
밑에 깔린 것들은 다 제 몫 다하고 잊혀졌지만.
2. 여자
겨울 동안 짙은 색깔 스타킹을 착용했다는 핑계로 더 짧아진 치마들
봄이라고 타이즈 벗어던지고 나니 무릎 위 한자나 드러난 맨살
익숙해져서인가 흉하지 않다.
죽순 같고 왜무 같아 아작아작 씹고 싶은 게 문제.
한강 건너며 바라보는 북한산이 수작 걸듯 다가온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나는 냄새 맡고 싶다.
누군가 열심히 씻어놓은 이가 있어,
우리 가끔은 저렇게
기분 좋은 하늘도 이고 사는 것이다.
가벼운 눈인사라도 건네야지, 목욕탕 다녀오는 청산옥 여자
하아얀 무르팍을 본 것 같이.
(... ...)
-윤제림, ‘4월’-
그때는 샴푸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세숫비누가 아까워 머리 감을 때는 빨래비누를 썼다.
{그래도 씻고 나면 냄새 좋더라.}
저녁 내내 파전과 빈대떡 부쳤으니 기름내에 절었을 것이다.
매상이라 치고 한두 잔 얻어 마신 것도 몸속에 쌓였을 것이다.
문 닫고 나서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아침에 선녀연(仙女淵) 다녀오는 마리아가 흥얼거린다.
“I don't know how to love him.”
월남치마 치켜 입었는지 무릎 드러난 것 보여
죄 짓고 싶어진다.
머리카락으로 향유를 훔쳤다면 아직 냄새 남았겠네?
비 오는 날 대숲에 가면
젖은 머리 죽 뻗은 다리로 다가오는 여자들 많다.
3. 시듦
시듦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성인이야.
나이 그만해서 안 가겠다는 이들
젊은이들만 못하다고 탄식하는 이들
참 딱해.
{어쩌자는 거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라는 말 자주 읊고서는...}
“탐화봉접(探花蜂蝶)인들 지는 꽃을 어이 하랴” 그랬다.
어이 하랴?
할 수 없어서 뿐만 아니고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꽃 떨어지는 건 체,
체가 아니고 체.
涕(눈물 흘릴), 剃(머리 깎을), 切(베일), 締(맺을), 그리고 諦(살필).
체념(諦念)이란 포기(抛棄), 그래서 포기(暴棄)가 아니고
‘도리를 깨달음’이라는 뜻이거든.
그래서 ‘사제(四諦)’라고 그랬을 것이고.
4.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고 주검을 표지하자는 뜻이라면
십자가 꽂지 않을 곳이란 없다.
{세상 모든 곳에는 죽음이 있었고
생명은 주검을 먹고 발생하고 유지되니까.}
표백분 바른 목에다 걸든 주교의 가슴에 붙든
그것들만으로는 다 안 되니까
Crucifix orchid가 사방에서 피어나는 거라고.
꽃핌이 그런 줄이나 알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