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갠 날
다들 어디 갔구나, 꽃놀이 갔나?
꽃 없어도 이런 날 방안에 있게 되지는 않지, 아픈 사람이 아니고서야.
책방에 몇 안 되는 의자, 내 차례 되기가 쉽지 않던 자리가 텅 비었다.
난 도둑, 책값 내지 않고 이것저것 뒤적거리는.
탐사해서 매장량 확인하고 광산 사겠다는 얘긴데 그런 장사가 어디 있나...
돈 놓고 돈 먹기로 ‘꽝’ 될 확률이 더 많지만 일단 거는 거지.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일단 선택하고 나서 후회하며
그러다가 후회해도 소용없으니까 용납하며 사는 건데,
책 한 권 살펴보고 시시하면 필요 없고
괜찮아도 다 읽은 것을 들고 올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니 모든 책은 셀로판지로 싸서 속을 들여다보지 않고 사게 해야 돼.
사돈 할 소리 내가 해주고...
{그런데, 사람들 없는 곳에 나만 와있으니까
사람 없는 사람이라 사람 없는 곳에 혼자 남게 된 것 같아 좀 그렇다.
사람들을 싫어하면서 사람 하나를 찾아내기는 어렵지.
윤중로 근처까지 갔다가 사람 파도가 꽃구름을 덮친 걸 보고 발걸음 돌렸다면서
고궁에서 길 잃지 않도록 손잡아줄 사람을 기다리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니까
관 둬라, 그렇게 봄날은 간다.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단지에 널린 끝물 꽃들과 일일이 인사 나눴다.
목련만 열두 종류더구나.
사진 찍어주면 좋아할 줄 알았더니 쫑알거리는 것 보게?
“취향도 특이해라 말라비틀어진 다음에야 찾아와서는...”
할머니가 그러셨지. “에구 흉해라 늙은이가 사진이 다 뭐야...”
{삽질이 개발되었어도 ‘寫眞’은 언짢겠지.}
선한 동기로 예쁘게 봐줘야 할 거라, 착한 고흐 아저씨처럼.
by Vincent van Gogh by Paul Gauguin
심술궂은 고갱은 주제에 폼까지 잡더라마는
“D'ou venons nous? Que sommes nous? Ou allons nous?”라고.
그늘에 진달래 딱 한 개 피었다.
적멸보궁(寂滅寶宮) 짓는 게 다 고통이지.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西域 三萬里,
흰 옷깃 염여염여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지 못하는 巴蜀 三萬里.
자, 자, 이런 날 심각할 것 있나,
부처님도 예수님도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갠 날?
그게 괜히 「나비부인」의 아리아를 ‘어떤 개인 날’ 옮기는 바람에 굳어졌는데
황동규도 노향림도 그렇다는데 내가 뭐랄 건 아니지만,
“설레이는 가슴을 달랠 수 없어”는 ‘설레는’으로
“어떤 개인 날”은 ‘갠’으로 바로잡아야 되겠지?
그래, 어떤 갠 날에는 맞고 그르고 하는 얘기 없기.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