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어제 목동에서 청파동까지 버스 타고 가는데 한 시간 이십분 걸렸다.

  늦어져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언짢은 시선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하철보다는 지상으로 다니는 게 낫더라.

  {생명은 거의 다 향일성(向日性)이잖아, 나도 그래.}

  한강 내다보며 ‘원원유장(源遠流長)’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노량진역에 긴 벽을 도배하듯 큰 글자로 그려놓은 광고문

  ‘자작나무 추출 핀란드 산 100% 자일리톨’을 보자마자

  가슴에 밀물로 들이닥치는 벅참.

  자일리톨, 그건 괜히 ‘ㄹ ㄹ’ 발음이 듣기 좋아서라고 치고,

  핀란드... 응 가봐야 할 데네, 시벨리우스, 백광, 자작.... 그래 자작나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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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작나무라면 백석, 자야, 나타샤...

  그리고? 유리가 탈출하며 헤매던 숲.

  또? 로버트 프로스트.

  {시 몇 구절 끌어다 붙이는 수고, 숨이 차니 오늘은 좀 봐주라.

  그 좋고 잘 알려진 시 ‘Birches’, 이렇다 할 좋은 번역이 없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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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에서 이십 년 살았으니까, 버몬트와 메인에도 더러 갔으니까

  자작나무 내 좀 알지, “갈 봄 여름 없이” 뿐만 아니고 겨울에는 더 좋은.

  보통은 떼로 몰려있어, 혼자로는 명품 족 나무들에게 꿀리는가봐.

  자작나무 있는 데는 죄다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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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백석, ‘백화(白樺)’-

 

  그런 델 가자면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라야 제 격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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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남는 일이 어찌 너에게만 힘겹게 여겨지겠냐

  말 안 해서 그렇지, “내 겪은 고난 누가 알랴”라는 사연 다들 지니고 살거든.

  자작나무는 유난히 자해한 듯 흠집 많이 드러낸다.

  다 까발릴 수는 없으니까 아픈 사랑 흔적은 저만 아는 상형문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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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꽃철 지나지 않았지만, 오월의 그 하얀 꽃들 줄줄이 이어지겠지만,

  아카시아, 조팝나무, 이팝나무, 국수나무, 산딸나무, 귀롱나무, 때죽나무, 가막살나무,

  쥐똥나무, 함박꽃, 찔레꽃, 바람꽃, 산사꽃... {화내지 말게, 이상 무순.}

  이제 잎들에 눈 돌릴 때 되었다.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침투하는 햇빛,

  약한 빛이라고 당당히 쳐다보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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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기로는 한 달쯤 더 가야 되겠지만

  ‘소만(小滿)’, 그 예쁜 말 미리 불러본다.

  채워지지 않았어도 “그만하면 됐지”라고.

  차자마자 내리막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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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

 

       조금 빈 것도 같게

       조금 넘을 것도 같게

 

       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

       내 마음의 그늘도

       꼭 이만하게는 드리워지는 때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

 

         -나희덕, ‘소만(小滿)’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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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작나무 잎들 스위트피 빛깔로 고운 때

  아직 더 기다려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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