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머문 자리

 

앉고 나자 눈앞에 표어가 다가온다.

“내가 머문 자리, 나의 인격입니다”

{아니 하필 이런 데에서 인격 운운...}

나와서 손 씻는데 또 뭐가 붙어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토씨가 잘못 됐다만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래, 내가 아름답다고 치고 여기가 뭐 그리...}

 

 

7042602.JPG

 

 

어느 사찰이었더라, 외국인이 더러 방문하는지 친절하게 영어로 표기했다.

HWAJANGSIL

{한글로는 무슨 표지가 없었음}

누구를 위한?

선암사 해우소처럼 ‘ㅅ간뒤’라고 붙여놓으면 희한한 골동품이라도 찾아낸 기분이겠는데...

 

 

7042601.JPG

 

 

다시 머문 자리로.

 

난 자신 없어...

사향노루 지나간 풀밭에서 사향 냄새 난다는데

내가 앉았던 자리에서 무슨 냄새날는지.

 

 

7042603.JPG

 

 

옛 적에는 이렇다 할 향수도 없었고

무슨 기화요초를 들여다 놓지도 않았으니까

꽃향기라야 매, 란, 국 정도가 대표선수이었고

더러 처녀가 가까이 오면 치자꽃 냄새가 난다고 그랬다.

그게 땅색, 똥색, 풀색, 하늘색, 살색... 그런 식으로

냄새도 아기 살 냄새, 살구 냄새, (좋은)내로 불렀다.

{에고, 형용사가 풍부하다는 우리말.}

 

좋은 냄새 좋고 나쁜 냄새 싫은데

좋은 냄새 별로 없어

나는 늘 두통으로 시달린다.

{제 냄새는 제가 맡지 못해서 괜찮다고 해도...}

 

 

7042608.JPG

 

 

영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서 에른스트에게 엘리자베트가 묻는다.

“어디서 리라꽃 냄새가 나요, 꽃 필 때가 아닌데...”

{그게, 꽃철이라 치고,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는데 무슨...}

“아 그 친위대원 친구 녀석 말이야, 날 환영한다면서 거품목욕 시켜주었거든...”

냄새란 묻히고 다니기도 하고

병자라서 안에 있는 것을 내뿜을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겠는데

당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나 코를 박고 자고 싶은 것이나 다 흩어져 사라진다.

 

 

7042604.JPG

 

 

내가 머문 자리 {돌아다닌 궤적이라 해도 그렇고}

뭐 남는 게 없다.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인격(persona)은 탈(mask)이라는 뜻이니까

등장할 때 쓰고 나면 그만이다.

 

 

               7042606.JPG   7042605.JPG

 

 

다섯 단계의 평가어 중에 나쁜 말이 없다.

秀, 優, 美, 良, 可

가! 佳 아니면 어때, 嘉 아니면 어때?

옳다는데, 좋다는데, 괜찮다는데, 됐다는데?

 

별세 시 내신 성적이 어떨는지

난 뭐 크게 마음 쓰이지 않는다.

{백수 도전의 가친은 안 그러신 것 같지만.}

 

Regrets, I've had a few...

그렇지만... 괜찮았다니까.

 

냄새는... 내 냄새 풍겼겠지 뭐.

 

 

7042607.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