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머문 자리
앉고 나자 눈앞에 표어가 다가온다.
“내가 머문 자리, 나의 인격입니다”
{아니 하필 이런 데에서 인격 운운...}
나와서 손 씻는데 또 뭐가 붙어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토씨가 잘못 됐다만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래, 내가 아름답다고 치고 여기가 뭐 그리...}
어느 사찰이었더라, 외국인이 더러 방문하는지 친절하게 영어로 표기했다.
HWAJANGSIL
{한글로는 무슨 표지가 없었음}
누구를 위한?
선암사 해우소처럼 ‘ㅅ간뒤’라고 붙여놓으면 희한한 골동품이라도 찾아낸 기분이겠는데...
다시 머문 자리로.
난 자신 없어...
사향노루 지나간 풀밭에서 사향 냄새 난다는데
내가 앉았던 자리에서 무슨 냄새날는지.
옛 적에는 이렇다 할 향수도 없었고
무슨 기화요초를 들여다 놓지도 않았으니까
꽃향기라야 매, 란, 국 정도가 대표선수이었고
더러 처녀가 가까이 오면 치자꽃 냄새가 난다고 그랬다.
그게 땅색, 똥색, 풀색, 하늘색, 살색... 그런 식으로
냄새도 아기 살 냄새, 살구 냄새, (좋은)내로 불렀다.
{에고, 형용사가 풍부하다는 우리말.}
좋은 냄새 좋고 나쁜 냄새 싫은데
좋은 냄새 별로 없어
나는 늘 두통으로 시달린다.
{제 냄새는 제가 맡지 못해서 괜찮다고 해도...}
영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서 에른스트에게 엘리자베트가 묻는다.
“어디서 리라꽃 냄새가 나요, 꽃 필 때가 아닌데...”
{그게, 꽃철이라 치고,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는데 무슨...}
“아 그 친위대원 친구 녀석 말이야, 날 환영한다면서 거품목욕 시켜주었거든...”
냄새란 묻히고 다니기도 하고
병자라서 안에 있는 것을 내뿜을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겠는데
당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나 코를 박고 자고 싶은 것이나 다 흩어져 사라진다.
내가 머문 자리 {돌아다닌 궤적이라 해도 그렇고}
뭐 남는 게 없다.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인격(persona)은 탈(mask)이라는 뜻이니까
등장할 때 쓰고 나면 그만이다.
다섯 단계의 평가어 중에 나쁜 말이 없다.
秀, 優, 美, 良, 可
가! 佳 아니면 어때, 嘉 아니면 어때?
옳다는데, 좋다는데, 괜찮다는데, 됐다는데?
별세 시 내신 성적이 어떨는지
난 뭐 크게 마음 쓰이지 않는다.
{백수 도전의 가친은 안 그러신 것 같지만.}
Regrets, I've had a few...
그렇지만... 괜찮았다니까.
냄새는... 내 냄새 풍겼겠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