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그만인 건 아니니까
겨울 언제 지났다고
머잖아 겨울이 온다 하는가
이토록 아름다운 오월에는
그냥 보고 맡고 즐겨요.
Robert Schumann, Dichterliebe, Op.48, No.1, Im wunderschonen Monat Mai
(Ian Bostridge)
기념일이라는 게 그래.
‘재작년에 라일락꽃이 막 피기 시작할 무렵’ 정도라고 해두면
해에 따라 봄이 빨리 혹은 더디 오기도 하니까
꽃이 필 때쯤 되어 그렇게 생각나면 되는 것이다.
떨어진 꽃을 그때 그대로 기억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런 꽃쯤 같은 나무에서, 아니면 다른 데 있는 다른 나무에서
이듬해 또 다음해 계속 필 테니까
“저런 꽃이었지” 하며 지나가면 된다.
{어버이날-그냥 ‘어머니날’이라고 하지-이라고 돌아다니는 정제알약 같은 꽃바구니를 보며
“사랑이 저런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품어가 반길 이 업슬새 글로 셜워 하노라” 라는 정서로 심통 나서가 아니라니까.
오늘 나도 나의 나됨(all that I am), 내 지닌 것 모두(all that I have)를 주셨던 분을 기억한다.}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듯
사랑은 가고 또 오는데
물의 흐름을 인지하는 거지 물결들을 기억하는 게 아니듯
사랑은 사랑으로 한번이지 이런저런 사랑들이 따로 지나가는 게 아니라고.
그래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정도로는 기억하게 된다.
종일 사막을 내달리는 동안 보지도 못한 얼굴이 신기루처럼 떠올라서
어디에 공중전화라도 없는가, 그렇게 안달하다가
보고나서도 희미함은 마찬가지라서
제 마음이 저를 놀릴 때에
그냥 “그때는 그랬었지” 하면 된다니까.
‘지난여름 갑자기’도 그렇다.
‘피서지에서 생긴 일’이라고 잊혀질 건 아니지만
고운 조각으로 모자이크에 박히면 된 거지
뭍에서도 살아 펄떡이는 물고기는 아니니까.
잊기도 하고, 잃을 수도 있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했다고 꼭 보게 될 것도 아니지만
떠날 때 떠나더라도
같이 있을 때는 꽉 참(full presence)만 누리기로.
아내 베짱이가 지아비에게 수심에 차서 하는 말-
“개미들은 겨울을 대비하여 양식을 갈무리하고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노래나 부르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요.”
게으름을 합리화하겠다는 게 아니고 해줄 말이 있거든.
“여보, 당신은 지난겨울을 기억하오?
우리에겐 겨울이 없어요.
살아 있는 동안 겨울이 오지 않고, 겨울이 온다고 해도 알 길이 없다오.”
막 날기 시작한 아이 제비가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꿀벌들은 꽃이 없는 겨울에 먹을 꿀을 한껏 모으고 있어요.
우리도 벌레들을 잡아서 어디다가 쌓아두어야 할까 봐요.”
아가가 벌써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뿌듯하긴 하다만...
“얘야, 꿀벌들이 모은 건 저들 차지가 되지 못한단다.
그리고 벌레는 쌓아둘 수가 없어.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겨울이 되면 여기 있지 않고 따뜻한 나라로 간단다.”
잘 알지도 못하고 돌아다니는 ‘Carpe diem’을 여기서 또 읊을 게 아니고
‘Memento mori’까지 곁들여 김새게 할 건 아니고...
‘Catch of the day’라는 표현 알지?
금일 특선! 주방장 추천이든지, “오늘에 한하여 특별가격으로 모시겠습니다”이든지,
오리지널은 ‘대어 상’이겠네, 아무튼...
오늘 큰놈 하나 건져 올리길 바라요.
누가 들어오는지 알지도 못하는 터에
“여행으로 한동안 자리를 비웁니다.”라고 써 붙이기도 우습지만...
아름다운 오월
활짝 팔 벌렸다가 꼭 안으세요.
그럼 평안히 계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