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 (Das Leben der Anderen)

 

뉴욕까지 가서 뮤지컬 하나 못 보고 왔냐고 해도, 에고 형편이 그런걸 뭐라 대꾸하겠는가

주말에 할인 요금 찾지 못하니까 ‘x 4’의 부담이 장난이 아니더라.

미술관 들려 영화 보고 왔으면 됐다.

갈 때마다 일부러 틈내어 들리는 데지만, 뉴욕 현대미술관(MoMA) 가족들과 가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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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얼굴 가린 만남?

사랑에 얼굴이 필요하던가?


억지고백이 짐이 되어 가뜩이나 고단한 나그네 길을 더 힘들게 할 건 없다는,

그렇지만 좋아서 만난 거니까 같이 있을 때는 좋다고 그러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당신을 만날 때마다 탈을 썼지만 이제는 가림을 치우고 싶어요,

내게서 견딜 수 없는 이 짐-위선이나 화장의 탈-을 벗겨주세요.” 그럴 때가 오기도 하는데,

그때쯤 되면 서로 사랑하게 되어 좋게 보이자고 썼던 탈이 피부가 되어 있더라는 얘기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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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아는 것이고

영화도 늘 보는 사람이나 뭐라 할만하지만,

그냥 나도 간만에 영화 한번 보게 되었다는 얘기다.

{옆 사람 손이라도 조몰락거리는 재미조차 없으면 영화 보러 가게 되지를 않아서 그간 본 게 없다. 

나이드니 어딜 혼자 가게 되지 않아서...}


애들은 “아빠는 또 잘 테니까 액션이 많은 걸 봐야 해”하며 「Black Book」를 권했는데

상영시간이 맞지 않아서 「The Lives of Others」를 보게 되었다.

녀석들 “어, 잠시도 졸지 않았다는 게 정말입니까?”로 나오길래

“끝이 좀 촌스럽긴 하다만, 감동은 대체로 촌스러움으로부터 야기되니까...”로 대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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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뮈헤(Ulrich Muehe), 거 참 물건이네.

타인의 삶의 감시 역이랄까 동독 비밀경찰(Stasi)의 비슬러(Gerd Wiesler) 대위를 맡았던 그는

통독 전 무대배우로 있을 때에 실제로 그의 아내에 의하여 감시당하기도 했다.

33살의 작가=감독 Florian Henckel von Donnersmarck-웬이름이 그리 기냐-

처음부터 그의 출연을 전제로 하고 대본을 썼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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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84년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오년 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예언이 말짱 엉터리로 판명되는 것도 아니고

예언이 성취되어간다고 무슨 징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지만,

1984는 죠지 오웰의 어쩌고저쩌고로 익숙해진 숫자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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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진정으로 떠받들지 않는 사상과 체제라고 하더라도 구조물은 보통 오래 간다.

{그러한 제도의 수혜자들은 시스템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를 바라지만

그들조차 장점과 혜택을 인정하지 않는다.

좌파니 친북이니 하는 분류가 공정하지 않기는 하지만, 그렇게 오해받는 이들이 사회주의 천국에 가서

저는 살기를 원치 않으면서 왜 그 체제와 사상을 고무, 옹호, 찬양하는지 알 수 없네.}

그런 데라고 뭘 모르고 충성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아서

비슬러 대위는 임무 때문만도 아니고 개인적 확신에 따라 체제를 수호하는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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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극작가 드라이만(Georg Dreyman)과 그의 정부인 배우 질란트(Christa-Maria Sieland)를

도청 등으로 감시하게 된다.

드라이만은 그의 친구 예술가들과는 달리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그저 그만큼의 재주와 어느 정도의 타협으로

나름대로 행복과 안정을 누리던 셈이었는데,

그가 불이익을 당하게 된 것은 반체제인사라서가 아니라

질란트를 좋아하여 강제관계를 맺은 고위인사(문화장관 Bruno Hemph)의 조종 때문이다.

‘개인’의 행복추구권이나 ‘사유’ 보장 같은 것은 없는 데니까...

{그런 이야기는 안 하기로 했으니까, 한반도의 두 체제를 비교한다든지 하는 일은 없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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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슬러의 변화와 회심이 잘 설명되지가 않는데...

삶의 기쁨이나 예술의 가치를 모르고 살던 냉혈 정보장교/ 심문관이

드라이만과 질란트의 애환과 고통, 그가 알지 못했던 세계의 교묘한 반전에

감정이입(Einfuhlung), 동정(sym-pathy)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는 사상과 체제를 배반한다는 게 좀...

그야 뭐 심층세계는 단일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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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이란 그에게 주어진 것이든지 그가 고른 것이든지 간에 누군가의 ‘선택’이었는데

그 어찌할 수 없는 ‘실수’를 절감할 때에는 ‘그렇게 짜여짐’을 돌이킬 길이 없다.

특정 개인을 악인이라고 비방할 것도 아니고...

통독 후 손 좀 봐줬으면 시원할 헴프가 뻔뻔 유들유들 싸다니는 게 속상하지만 그런 거지 뭐.

힘을 가진 사람이 견제당하지 않는 세상에서

‘부정(父情)’을 들먹이며 “나라도 힘 있으면 그랬겠다...”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돈으로 합의 보면 없었던 일로 되니까...


{응,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왜 이렇게 길어졌을까?}


영화에서 ‘이년 후에...’, ‘그 후’로 자막이 나오는 것은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그걸 다 말할 수 없고...”, “중요하지 않은 건 빼고 하는 얘기지만”이라는 뜻이겠는데,

감독이 세련된 다음엔 그런 구절은 삽입하지 않으리라 기대한다.

{데뷔에 성공했다고 다 잘한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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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시선}은 누구 말처럼 지옥이 아니고

내가 나로 있게 하는 규범인데,

사회주의니 민주주의니 인민공화국이니 그런 게 아니고 ‘타인’이 ‘체제’이다.

내가 나를 보지 못하니까 ‘타인의 삶’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흠모, 혐오, 자기애를 행사하는 것이고.


‘착한 사람’이 따로 있겠냐만,

있다 치고 그들 위해서 난 무엇을 헌정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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