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 해당화
1
미국에서도 찔레꽃과 해당화를 볼 수 있다.
한국에서 피는 것들과는 다른 별종이 아니라 태평양을 건너가서 퍼진 것들이다.
{왕창 피어나길래 Rosa multiflora라 했을 것이고,
극동 산이면 모두 일본 것인 줄 알고 주름도 없는데 흉보느라고 Rosa rugosa라 했겠지.}
찔레는 토양 손실을 방지한다고 그러더니만 이제는 너무 잘 퍼진다고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드물게는 분홍으로 물든 꽃잎도 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그건 좀 아니다만.
해당화는 대서양 연안 따라 올라가다가
겨울에는 너무 추워 사람은 떠나고 배도 다니지 못하는 Nova Scotia까지 가서 핀다.
Peggy's Cove의 등대 곁에서 보는 해당화라니...
그런데, 같은 꽃이라도 어느 곳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정말 그 꽃이 맞는지 싶도록 전달되는 정서와 일어나는 감흥이 다르다.
개망초, 개떡, 개살구...처럼 그것 같으나 격이 떨어져 시원찮은 걸 두고 ‘개’자를 붙이는데,
그 쪽에서는 꽃 이름을 모르기에 그냥 들장미(wild rose)라고 하든지
더러는 Dog rose-그런 개 같은 혼동을...-라고 그러는데
그것은 지중해 원산의 Rosa canina의 속칭이니 찔레나 해당화를 두고 부를 이름은 아니다.
2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이연실의 ‘찔레꽃’은 청승맞기 짝이 없다만...
그때 사정은 그랬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홀로 남아 집을 보다가?
요즘이야 아동보호법에 저촉되니 아기를 혼자 내버려둘 수는 없지만
그때 형편은 그랬다니까.
대선을 준비하는 이들이 수십 년 전 ‘개발독재’의 공과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저들 유리한 편으로 해석하지만...
그때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라는 표현만은 정확히 짚은 것이었다.
먹고 죽지 않을 것이라면 입에 집어넣던 시절의 찔레꽃과 찔레 순,
그건 무슨 낭만적인 기억이 아니었고.
3
이연실 전에도 한반도에 찔레꽃이 있었거든.
“‘찔레’가 죽은 자리에서 자란 나무에서 꽃이 피었는데 그게 바로...” 같은 전설 아니라도,
찔레는 그 옛날 원나라로 끌려가던 고려 처녀들이 혹은 바라보고 혹은 입에 물고
눈물짓던 꽃이었거든..
속국의 여자를 징발하여 노비나 성노리개로 삼음이 정복자의 권리였던 것은
최초의 부족 전쟁 이래 줄곧 이어온 역사인데,
그래도 이십세기 개명천지에서 그랬다는 게 낯짝 깎이는 일이라서
희생자와 증인들이 살아있는데도 그런 적 없다고 잡아떼는 일본애들 내 참...
그런데, 우리 편에서는 그게 처음은 아니었으니까.
몽고의 침입과 25년(1231-1257)간의 전쟁 중에 20여만 명이 끌려갔다고 하니
당시 인구로 미루어본다면 처녀의 씨가 마를 정도였으리라.
그 후에도 해마다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씩 여러 차례 공녀(貢女) 차출이 있었는데
한산(韓山) 이씨가 자랑하는 이곡(李穀, 당시 典儀副令, 牧隱 李穡의 부친이고 李塏의 고조)이 원에 있을 때에
고려에서 처녀를 구하는 것을 중지할 것을 상소하여 공민왕 때 이르러 중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지 않으려고 더러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대들보에 목을 매어 죽고
딸을 숨겼던 부모는 주리를 트는 형을 당하고 그랬다는...
{응, 찔레 얘기가 왜 그런 쪽으로 빠지게 되었지?}
4
거기는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 가봤던 덴데
그때 많이 피곤하고 불안하고 억울했다.
곧 해당화 만발하겠네.
게걸음으로 닿을 건 아니고
푸른 하늘 떠도는 흰 구름(蒼空來往白雲浮)으로 한번 다시 들려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