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날 시름시름 - 권정생 랍소디
개성에 들어가는 줄 알고 기대하고 나섰다가
공단 내에서 나와 관계없는 지루한 회의에 참관인으로 앉아있다 왔다.
검색만 없으면 한 시간에 닿을 거리를 다녀왔는데 몹시 피곤하다.
배도 쌀쌀 아프고... 응, 요즘 왜 그러지?
쌓아두고 쓰지 않으려면 돈 뒀다 뭐 하게?
평생 “주여!” 부르짖고도 아무 힘이 되지 않는 믿음 뒀다 뭐 하게?
그러니 나 올라가라고 거기 있는 언덕배기 뒀다 뭐 하게?
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휴일에 뒷산에 올라가고는
“오늘은 코스를 줄여서...” 내려가다가
“아냐 일찍 들어가서 뭐 한다고...” 다시 올라가고
그러다보니 집이라고 갈 데가 있는지도 분명치 않게 되었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김광섭, ‘산’ (부분)-
내려는 가야 하니까
“산이 산 같아야 말이지...” 하며 내려왔다.
어쩌면 그렇게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까?
여행 중이라, 그 후에도 신문을 들여다보지 않아서, TV는... 본 적이 없으니까...
권정생 선생께서 돌아가셨다고.
{그때 알았다고 보내드리는 마당에 가서 절 한 번 하지도 않았겠지만.}
그렇게 빨리 가실 줄 몰랐다는 말? 그거 정말 화나게 한다고.
전우익, 이오덕 선생 먼저 가셨고
성한 데 없는 몸으로 그만큼 오래 사셨으면 잘 버티신 건데
이제 와서 무슨...
꽃을 하나하나 매달아 놓은 것도 아닌데
아니, 한 땀 한 땀 꿰어 엮었다고 해도 마르는 거야 어쩌겠나
벙글고 이우는 게 어찌 자네 걸음 기다려 맞추겠는가
그렇게 빨리 졌다고 말하는 게 아니네.
다시 만나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해서, 지키지 않은 약속에 대해서
“시간이 더 주어졌더라면”이라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말게.
{작품이나 어록이야 이리저리 찾아보면 줄줄이 달려 나올 감자알 같을 터이니...}
그분의 인터뷰 실력이나 접대 방식도 수준급이었다.
전화가 없으니 허락이나 약속을 받아낼 수도 없지만
그래도 불원천리하고 찾아온 이들을 문전박대, 최단시간 내 축객 령 선포 등의 기록을...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냥 가끔 숨 쉬러 밖에 나오는 정도지요.”
-방은 따뜻합니까.
“당연히 춥지요.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게 살아야 하는 게 사람의 도리이지요.”
빌뱅이 언덕 다섯 평짜리 오두막 주위에는 그 흔한 찔레라도 무더기로 필 때인데
그것조차 사치인가, 엉겅퀴만 잔뜩 자라서... 그러니 살구꽃은 철이 아니지만
조화로 찔레라도
그를 캐내고 닦아 세상에 내놓고 그 후에도 돌본 이는 이오덕 선생이었다.
숨겨진 ‘국보급 인물’은 그렇게 세상에 드러났는데, 그래도 알아보는 이 별로 없었다.
다만 이오덕은 권정생에게 있어서 ‘살아갈 이유’이었다.
그는 세상모르고 투정부리는 막내를 돌보는 대형이고 ‘Papa le bon dieu’이었다.
만남은 ‘강아지똥’이라는 동화를 본 이오덕이 물어물어 찾아옴으로 시작되었고
그 후 많은 편지들이 오갔다.
-바람처럼 오셨다가 많은 가르침 주시고 가셨습니다. 일평생 처음으로 선생님 앞에서 마음 놓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 선생님을 알게 돼 이젠 외롭지 않습니다.
-산허리 살구꽃 봉오리가 발갛게 부풀어 올라,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걸 보고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괴로울 때마다 선생님을 생각해봅니다.
삼년 전에 이오덕 선생이 먼저 가실 때에 못내 염려스러워 당부하셨다.
“괴로운 일, 슬픈 일들이 많아도 하늘 보고 살아갑시다. 부디 살기 위한 싸움을 계속해주시기 바랍니다.”
유언대로 이오덕 선생의 묘에는 권정생 선생의 시 ‘밭 한 뙈기’와 자신의 시 ‘새와 산’을 새긴 시비가 나란히 섰다.
사람들은 참 아무 것도 모른다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
그걸 모두
‘내’ 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 것은 없다
하나님도
‘내’ 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된다
밭 한 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 것이 아니다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새 한 마리
하늘을 간다.
저쪽 산이
어서 오라고
부른다.
어머니의 품에 안기려는
아기같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날아가는구나!
아, 돈은 뒀다 뭐 하냐고 그랬지.
지지리 못 살았지만
그래도 책 꾸준히 팔렸으니 한 십억 남기셨다는데
앞으로도 인세는 계속 들어올 텐데
북쪽 아이들 위해서 사용하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고.
{그렇구나!}
어린이 같이, 어린이답게, 어린애처럼...이 다 같은 말은 아니겠지만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의미로
권정생 선생님은 어린이로 살다 가셨다.
두서없이...
그럼 그만 할까 해요.
술은 안 드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