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오래간만에 외출하더니 장미 한 다발을 들고 들어섭니다.
“응? 웬 장미?”
정리해서 아버님 영정 앞에 놓더니 “Father's Day라서”라나요.
아버지날이라, 그렇구나...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뭐 나를 생각해주는 것도 섞였겠지요.
{점심 메뉴가 ‘냉+갈’에 디저트로 black forest cake, “원, 잴 게 따로 있지.”}
아내는 작은 꽃, 볼품없다고 그러기는 안됐고 앙증맞다고 할까 그런 것들을 좋아하고,
화려하고 큰 꽃들은 ‘우주식물 같아서’ 싫다고 그럽니다.
{아니 지구밖에 무슨 생물이 존재한다고, 있다 치고 언제 봤다고 우주식물?}
그러니 들꽃다발 같은 게 있다면 그런 걸 사들고 왔겠지요.
그런 건 슈퍼마켓에서 팔지 않으니까.
반복해서 가르쳐줘도 또 물어보네.
“Chickweed예요, 한국에서는 그나마 별꽃이라는 예쁜 이름 얻었지만...”
장미라, 꽃 중의 꽃이라 할 만한 것? 여왕?
당장 눈에 띄고 향기만 가지고 고르라면 장미에 비길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특성을 드러내고자 수천 원예종으로 만들어졌을 테니
상업적 가치의 관점에서 딱 하나만 고르라면 그런 장미들 중 하나가 꼽히겠지요.
무난하기로야 긴 줄기 붉은 장미일 것이고.
한국에는 어딜 가도 꽃이 넘치더라고요.
서울에야 말할 것도 없지만, 교통량 적은 시골길에도.
{그게 먼지로 뒤덮인 시가, 그리고 온통 까망머리들이라서 그런지 확 밝아지는 것 같지는 않더만.}
그렇게 도배한 꽃들이 화려한 빛깔의 양(洋)꽃 일색이더군요.
양귀비, 팬지, 금계국-워낙 퍼져 토착화한 셈이지만-... 거기에 장미까지.
옛적에 농촌의 꽃밭은 키에 따라 앞부터 채송화, 봉숭아, 백일홍, 맨드라미, 겹세잎국화...
그런 식으로 꾸며졌지요. 양아욱이니 마가렛이라고도 부르던 샤스타데이지, 글라디올러스, 달리아 같은 것들이 나중에 끼게 되었고.
이제는 장미, 남원을 한참 벗어난 어느 농가 앞뜰은 그냥 장미원이더라고요.
서울로 올라와서 가게 된 올림픽공원
그 자리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오랑캐에게 무릎 꿇은 치욕의 현장이었고
제가 고등학생 시절 방황할 때에 조퇴하고 가던 곳이었는데
올림픽 경기장으로 꾸민 후로는 처음 찾아가보게 되었습니다.
아, 장미가 널렸더라고요.
{한창 때를 살짝 벗어난 즈음.}
이제는 식상한 표현이지만, “장미가 지고서야 그 아름다움을 알도다.”
상투성을 완화하자고 한마디 더하자면, 얼마나 다행인가, 꽃이 진다는 게.
“아름다울수록 빨리 시든다”라는 공식이 있는 건 아닙니다.
아름다운 만큼 오래 가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지킬 수 없다는 안타까움 때문이겠지요.
빨리 시드는 건 섭섭하지만, 영영 시들지 않는다면?
그런 끔찍한 비극이라니.
조화(造花)가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움이야말로 얼마나 지겨운 것일까?
진시황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불멸(不滅)을 확보하고 싶겠지요.
말이 안 되는 거지만, 다음 말을 잇기 위해, 불멸이 가능하다고 치자면요,
결단할 필요 없겠네, 최선의 선택이 의미 없을 테니까요.
무한한 연장, 끝나지 않는 세월 속에서 이것저것 다 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즐겁지 않거나 이룸(成就)이 없었다고 해도 내일, 또 내일이 있으니 후회할 이유가 없겠네요.
‘실패’의 개념조차 생기지 않겠지요.
{실패란 ‘제한된 시간 안에서’ 의도대로 되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로 이름이니까요.}
시들지 않음, 썩지 않음, 죽지 않음이 보장된 세상.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지만, 상상만 해도 지긋지긋하지 않습니까?
영원한 사랑? 그것도 그러네요.
그럴 수 없으니 그랬으면 하는 거지, 그렇다면, 정말로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도 사랑?
‘영원’과 ‘사랑’은 모순개념이라니까요.
말하다보니, 씁쓸해졌어요.
“그래서 사랑!”이라 합시다.
쉬이 시들고 금방 사라지는 최상의 아름다움, 그래서 어떻다는 건지?
장미는 장미.
사랑은 사랑.
인생은 인생.
영원하지 않은 사랑은 그래서 할 만한 가치가 있고
영원하지 않은 인생은 그래서 살 만한 가치가 있고
영원하지 않은 사랑의 아름다움은 그래도 영원하고
영원하지 않은 인생의 고귀함은 그래도 영원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