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약은 있어야
1
휴일이지만 시시한 볼일로 나갔다가 들어가기에는 이른 오후 3시.
종로삼가역이다. 나가면 바로 인사동인데...
고민은 짧고 결단은 단호해서 그냥 갈아탔다. 가지 뭐.
자는 게 보약이니까...
연애욕구 없으니 문화욕구도 없어서
인사동? 거길 왜?
여드름자리가 오름의 분화구처럼 남아있던 고일 때였다.
화동에서 안국동으로 나와 종로 2가에서 버스를 타는 게 귀갓길이다.
갑자기 여자애 하나가 다가오더니 내 모자를 빼앗아 단성사 쪽으로 내뺐다.
“이리 오면 줄게.”
{그러니까 ‘종삼’의 호구로 따라 들어오라는 얘기}
그곳은 음부의 권세가 지배하는 곳, 게헨나... 거기가 어디라고...
불쌍하게 보이려고 최대한 노력하며 울상으로 바라보다가 모자 없이 가기로 했다.
행여나 마음을 돌이켜 돌려줄지도 모르니까... 해서 천천히 걸음을 떼는데...
“이 ㅂㅅㅅ꺄, 모자 안 가져가?”라는 비열한 음성이 가까운 데서 들린다.
그럼 그렇지... 싶어 돌아서며 꾸벅.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뛰어왔기에 숨소리 거친 여자의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애구나. 화장은 심하다만 나보다 나이 더 먹지 않았겠구나.’
도망치듯 돌아섰다만...
‘걔 동무가 돼줄걸...’ 슬프더라.
거기 그런 데였거든.
지금은 그런 모습 찾아볼 수 없지만
그런 데 아니라도 그런 데보다 날 것 없는 그런 데지 뭐.
어디라도 다 그렇지 뭐.
{아 그때도 대원군 그림이라는, 이완용 글씨라는 그런 것들 몇 개 진열한 데가 두엇 있었어.
-진짠지 모르지만, 이완용이야 가짜를 가져다놓을 필요있겠나- 그때도 ‘문화거리’ 싹수는 있었으니까.}
2
어디에서 만났더라? 어디서라면 다시 볼 수 있을까?
그가 출몰하는 거리에서 배회하면 언젠가 조우하리라는 기대?
접어.
다니는 길목이 뻔하니까 지키고 서 있으면?
사냥꾼이나 형사는 아니잖아.
그렇게 마주치면 어쩔 건데?
포충망을 휘두를 것도 아니고...
{Terence Stamp인가 눈 파란 애 나왔던 ‘The Collector’ 말이지...}
채집이 아닌 다음에야
가버린 것 찾아 헤맬 게 아니지.
죽은 걸 박제로 남겨서 뭐하게?
3
감꽃 떨어질 때 떠나면서 감 익기 전에 돌아오겠다는 얘기
그건 약속 아니거든.
{‘떠날 때는 말없이’가 차라리 낫다고.}
조선독립군 접선하듯 불쑥 나타났다가 닭 울기 전에 사라지는 것?
그건 당한 거지 기다림의 보상이 아니라고.
떠나서 헤어진 게 아니고
다시 만날 날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야.
보고 싶으면 제 편에서 연락하겠지?
그건 ‘관계없음’이야.
너는 아무래도 좋다면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얘기구나.
길들임
그건 묶임이 아니라고.
묶이자는 게 아니지만 약속은 있어야 돼.
약속 없이는 아직 ‘사랑’ 아니거든.
한가할 때 우리 한번 보자고?
그건 아냐, 아니니까
목요일, 목요일 저녁 7시, 사냥꾼들이 마을처녀들과 춤출 때 우리도 만나자고 그래.
기다리자면
기약이 있어야 돼.
‘하염없이’가 아니고 countdown의 짜릿함이 있어야 즐겁지.
행복한 사랑은 없지만
행복한 기다림은 있다고.
그것이 괴로운 사랑의 즐거움이라고.
4
시작은? 금빛 머리칼 같은 것 말이지.
나는 빵을 먹지 않아, 밀은 내게 아무 소용이 없어... 그러나 네 머리칼은 금빛이야.
그래서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날 거야.
밀은, 금빛이어서, 너를 생각나게 할 거야.
그래서 나는 밀밭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사랑하게 될 거야...
그리고 다 잃은 걸까?
얻은 게 있지. 밀 색깔은 거기 있으니까.
검은 구름 다가오고 까마귀들이 몰려다니는 때에도
그 빛은 남아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