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없더라도

 

 

힘이 없는 정의는 타자에 의해서 주체성이 부인되고

사랑이 없는 정의는 스스로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고

정의가 없는 사랑은 사랑 없는 세상으로 가는 지름길이고

힘이 없는 사랑은 사랑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사랑도 있어야 하고 정의도 있어야 하지만

힘이 있어야 되겠네?


그 힘이 뭐냐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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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전능하지 않아서?

그분의 전능하심은 그분의 풍성한 사랑을 훼손할 수 없으니까

논리적으로는 전능하시다 할 수 없겠네만

‘둥근 사각형’을 만들 수 없음은 불능(impotence)이 아니고

본성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 없음이 본성이니까 그것도 모순이 아니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힘을 다 행사하지 않음에 있다.

그러니 ‘사랑의 하나님’ 아니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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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는 사랑이 사랑 없는 힘보다 강하고

사랑은 힘보다 강하다.


하나님은 무력하시기에 오직 사랑.

사랑으로 역사(役事)하시기에 오직 능력.


사랑이 크면 클수록 힘에 의존하지 않게 되고

힘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힘 아니겠는가?


힘 들이지 않고 일이 풀리게 하는 힘이 슬픔이다.

슬픔은 무분별한 힘의 행사를 제어하는 안전장치이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나님.

The most merciful is the most sorrow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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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추구하는 종교는 원시적이다.

거물 숭배, 주술, 자기 종족의 승리...

교회 성장, 거대한 성전, 침략적인 확장...

 

사랑으로 죽음과 미움의 권세를 이기신 분을 따른다는 자들이

힘을 숭상한다면 많이 잘못된 것이겠지?


아씨시의 프랜시스, 탁발 수도자들, 가난한 전도자들...


여러 해 전에 시골 교회 전도사님과 점심을 든 적이 있었다.

툇마루에서 상을 받고 감사하는데 무슨 식사기도가 그리도 기냐?

수제비를 들게 되어 언짢은 게 아니고

눈 감고 있는 동안 퉁퉁 분 수제비국에서 수상 스키하는 똥파리들을 쫓지 못했기 때문.

한 그릇 비우고 힘 얻어 큰 소리로 찬송 불렀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좀 전에 마침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천지를 그려 넣을 거대한 캔버스((畵布)는 얻었으나 그것에 어울리는 화공이 없구나...

감사하면 되겠네. 

수제비 먹고 헛 트림 세게 하면서라도 찬송하면 되겠네.


{떼 지어 ‘단기’ 선교 나가지 않아도...}


{할 말 다할 것 아니니까...}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삼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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