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일기 6 -친구
1
“자네는 하나도 안 변했구먼, 어찌 그리 옛날 그대론가?”라는 말은 찬사이거나
신뢰의 표시이다.
물론 사람이란 변하고, 적어도 육체적으로는 늙어가면서 흉하게 변한다.
그러니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부 성 짙은, 많이 보탠 말인 셈이다.
그래도 그런 인사를 받으면 기분 좋아져서 “자네도 참... 많이 늙었네.”로 나올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따리(?)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동안 수양을 많이 쌓아 나름대로 많이 달라졌으리라’ 기대했던 그에게 옛날 그대로라니!
다 변하지만, 변하지 않을 수 없지만
변해야 할 것도 있고, 그런 것은 빨리 바뀌어야 하지만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는 것들도 있다.
친구들 몇이 어울려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VIP 대접이 몸에 배어 도무지 불편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까탈 부리니까
다른 이들이 불편하게 되었다.
그러면 친구들에게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 친구 변했어.” 소리를 듣게 된다.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 뭐... 그동안 걸어온 길이 다른데 뭐...
그렇게 다시 모일 수 있는 건만 해도 좋은데 뭐...
그간 멀리 있었으니 더 다가가면 되겠지 뭐...
2
응, 정말 과일바구니를 들고 오는 이가 있네?
어제 가만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 지하철에서 내려 언덕을 한참 올라와야 하는 병원에
K형이 무거운 과일바구니를 들고 찾아왔다.
동창회 총무 일을 맡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많이 생각해주니까 왔겠지.
형 노릇을 못하니 아우님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L선생 내외도 울산에서 일부러 올라왔다.
참 고맙다.
얼마 전에는 H형이 불러내어 S형과 함께 만난 적이 있다.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오르세 미술관 전’을 둘러보았다.
나와서 밥과 물을 나누었다.
그런데, 생갈비 일인분이 내 점심 값 열흘 치와 같다니
잘 먹긴 했다만 기가 차다.
그 ‘만종’인가 하는 것, 그 앞에 사람들이 하도 많이 모였기에
흙내 아닌 땀내와 향수 냄새로 골치가 아팠다만...
‘이발소 그림’이라고 흉보던 것 앞에서 우리도 제법 오래 서있었다.
{전문가라는 S형이 “저거 가짤 걸...”하는 바람에 김샜지만.}
{어린 박수근이 그 그림을 본 것은 단테가 베아트리체와 조우했던 만큼이나
영감의 섬광이 번쩍인 사건이었으니까...
아버님이 그 옛적에 매파가 소개한 처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실 때에
“저는 ‘만종’의 분위기를 좋아합니다.”라는 말에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고...}
3
내가 뭐 갈비 얻어먹고 과일바구니 받았다고 코끝이 시큰해져서 하는 말은 아닌데...
난 거지야.
{받는데 너무 익숙하거든.}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마지막 남긴 말은 “(말이야 바르지) 우린 거지야, 암~”이었다.
공로 없이 은혜로(공짜로) 받은 구원의 감격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야 바르지... 아닌가?
보통사람들은 주고받으며 살 것이다.
(전혀 안 받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주 많이 주기만 하며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도무지 받을 줄만 아는 사람도 있겠고...
‘술 한 잔에 시 한 수’라고 그랬는데
받아먹었으면 뭐라 인사라도 있어야 할 것이다.
좋은 이름(金炳淵, 蘭皐) 두고 김삿갓(金笠)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푸대접에 비위 상하면 심통도 부렸지만
얻어먹기에 이골 난 그가 멀건 죽 한 그릇밖에 대접할 게 없어 미안해하는 농부에게
남긴 노래가 있다.
四脚松盤粥一器 다리 넷 달린 소반에 죽 한 그릇 뎅그러니 놓였는데
天光雲影共徘徊 (그나마 하도 묽다보니) 하늘빛과 구름이 함께 떠도는구나
主人莫道無顔色 주인이여 무안해할 것 없소이다
吾愛靑山倒水來 내 본시 물에 뜬 청산 그리매를 좋아하니 말이외다
나는 이쑤시개를 사용했으니
뭐라 해야 할지?
4
한 잔 꺾자는 게 아니고 들어찬 달을 삼키자는 걸세.
비 오지 않아도 초하루니까 달 보지 못할 밤이니
좀 있다 또 보세.
경포에 달이 몇 개인지
와온에 달이 몇 개인지
우리 만나면 몇 개나 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