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맞이 2
나태주 시인은 나보다 한 살 많은 중늙은이로 시골 교사를 오래 하신 분으로 알고 있다.
딱 그만큼의 시를 쓰는, 제 분수를 아는 시인이라 마음이 놓인다고 할까...
{시원찮은 말이지만 존경과 애모를 담은 추천사인 셈.}
그가 ‘반성문’을 남겼는데-
들판 건너 나무들 보며
풀꽃들 보며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흰 구름 보며 공기에게도 말을 걸어본다
미안하다 미안해
내가 너무 오래 사람인 거 아니니?
마지막 행의 촌스러움에 아연하게 되는데...
‘Non-비범’의 극치로 성불하기에 이르자면 그냥
“내가 너무 오래 산 거 아니니?” 정도면 됐겠다.
하긴, ‘사람’을 ‘살-알’ 혹은 ‘살-앎’으로 읽을 때에
양어(洋語) 문법 식으로 말하자면 완료진행형의 분사쯤 되니까
사람은 더도 덜도 아닌 ‘산 것’ 아니겠는가.
신파의 절정으로는
“내가 너무 오래 사랑한 거 아니니?” 그러면 되겠고.
아무튼... 가을을 맞아
연한 것, 여린 것, 약한 것, 가물거리는 것, 스러지는 것, 바스러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미안하기야 하지.
맞아, 너무 강하고, 너무 오래 자리를 비켜주지 않지.
하지만 사람이라고 별건가-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벧전 1:24)
(All men are like grass, and all their glory is like the flowers of the field;)
그러니 사람이라서 미안할 건 없네?
또 그래, 풀이면 어때, 꽃이 왜?
Warren Beatty와 Natalie Wood의 ‘초원의 빛’이 먼저 생각나서 좀 그렇지만
William Wordsworth의 과한 제목의 시
‘Ode on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에서 그랬듯이
What though the radiance which was once so bright
Be now for ever taken from my sight,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u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이운다고 멸절(滅絶)하는 건 아니니까...
“북풍한설 찬 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그런 노래도 있고.
오래 살 것 없다고 말들 하면서도
더 오래 살고 싶어 하는데
오래 살면서 미안한 표정 짓기도 하고
오래 된 모습 보며 언짢아하더라마는...
힘겹게 서 있는 맨드라미 꿀밤 먹이듯 머리를 톡톡 쳤다.
“그 모양 되도록 여직 있었단 말이냐?” 그러자
까만 씨알들을 눈물처럼 뿌려대더니 고개를 꺾었다.
어디다 둘 데도 없어서 손바닥을 털었다.
잘 묻어주지도 않았지만
내년엔 수없는 맨드라미가 솟아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