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흙이니
오늘 아침 직원들의 인트라넷에 올린 묵상 자료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제목: 너는 흙이니
본문: 창세기 3장 19절
흙으로 빚어 생겨난 인간은 흙에서 먹거리를 공급받고, 흙으로 집을 지어 흙 속에서 살다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흙 속의 또 흙’ 곧 땅이 됩니다. 흙에서 난 사람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흙에서 자라는데, 흙이니까 흙을 사랑하고 흙을 가꾸는 마음을 농심(農心)이라고 합니다. 제 주제 파악이 안 됐나, 제 근본인 흙을 미워하고 흙을 훼파하는 마음을 기심(機心)이라고 합니다. 장자라는 현인은 기심을 경계하였습니다. 이 기심을 쉽게 풀이하자면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이라 하겠는데, 약삭빠른 마음이라고나 할까, 얄팍한 술수를 쓰는 마음이라고나 할까,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 마음, 바른 길이 아니라 빠른 길을 찾는 마음, 욕심, 경쟁심이 기심에 해당됩니다. 기심은 농심에 반대되는 말입니다.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는 말은 옛말입니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기심을 가지고 삽니다. 기심이 이른바 ‘성공’의 동기 유발과 수단 동원에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심으로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찌 천심, 하늘마음, 한울마음, 한님마음, 하나님의 마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기심을 가진 교인은 세속의 삶에서 성공할 수는 있어도 그의 믿음은 자라지 않습니다. 기심을 가진 목회자는 교인 수를 늘릴 수는 있겠는데, 그리스도께서 떠나신 자리를 사람들로 채우면 하나님께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은 쫓겨나셔서 영문 밖에서 고난당하시는데, 성내 교회, 문안 교회는 날로 커지대요.
농사를 잘 지으려면 흙을 잘 알아야 합니다.
흙은... 정직합니다. 흙은 심은 대로 싹이 나게 하고, 정성 드린 만큼 자라게 합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콩을 거두게 합니다. 흙은 ‘바꿔치기’를 하지 않습니다. 콩 심은 데서 팥을 내지 않습니다. 흙은 받은 것을 돌려내되 불려서 냅니다. 콩 하나 심었다고 콩 하나 돌려주는 게 아니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돌려줍니다. “정직이 최상책이다”라는 말을 듣기는 하였어도 적용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땅을 돌아보십시오. 정직해도 백 배의 보상이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심기만 하면 되는데, 심지 않고 거두려고 한다면, 그것은 게으름이요 속임입니다. 심지 않고 거두려 하고, 썩을 것을 심고 썩지 않는 것을 거두려는 자는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일렀으되,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 8).
자, 흙이 정직하다고 했지요? 한줌의 흙, 한 뙈기의 땅에서 우리는 정직과 성실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성실’이라는 말을 한번 써보십시오. 실(實)은 열매이지요? 성(誠)은 ‘말씀이 이루어짐’ 아닙니까? 그래서 충성(忠誠)이라 하면 “마음 가운데 말씀이 이루어짐”아니겠어요? 그 마음이 뭐겠어요? 농심이지요. 흙을 알고, 흙을 사랑하고, 흙을 가꾸는 흙 같은 마음에게 열매가 있습니다. 그것을 풍성한 삶(abundant life)이라고 하지요. 일렀으되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자, 이 말씀에서 ‘나’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분이 “나는 흙이라”라고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흙같이 사신 분이었습니다.
흙은 낮은 곳, 구멍 난 곳이 있으면, 메우려고 낮은 곳으로 모여듭니다. 높은 산이 낮아지고, 낮은 골짜기가 메워지게 하는 것이 흙입니다. 흙은 밟으면 밟힙니다. 흙은 부드럽습니다. 흙은 덮어줍니다. 까발리는 것이 아니라 덮어준다는 게 결코 작은 덕은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린다고 했지요? 흙 같은 사랑, 흙 같은 겸손, 흙 같은 섬김... 그 흙의 본성을 ‘삶’으로 가르쳐주신 분이 있었지요? ‘그 분 안에 거하면, 그 분이 당신 안에 거하시면, 당신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그 분을 떠나서는 당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흙은 말이지요, 아무 것도 아닌 듯한데 가장 귀한 게 흙입니다. 여기에 허무주의, 운명주의를 극복하는 단서가 있습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살다가 흙이 되는 것은 말짱 헛일이 아니고, 아주 실팍한 것, 꽉 찬 것, 그래서 보람찬 일입니다. 제 몫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소재가 흙이었다고. 뽐낼 것은 아니지만, 흙으로서의 자존심의 근원이 바로 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는 사실! 그것이 엄청난 가치와 보람입니다. 흙이라도, 그게 토기장이의 손에 들려져서 질그릇으로 빚어 나오면, 그냥 흙만은 아니거든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너는 흙이니!” 이 말씀은 분명히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에 대한 선고문에 있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 존재의 연약함, 구원의 상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육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너는 흙이니”라는 구절을 “기왕 흙이라면 흙답게 살아봐라”라는 말씀으로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흙처럼 정직해라. 흙처럼 겸손해라. 흙처럼 사랑해라. 흙처럼 섬겨라. 흙처럼 생산적이어라」 그러한 도전이 오늘 말씀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