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맞이 4
머피의 법칙 들먹일 건 없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 아니고 비 오는 날, 늘 그랬다.
그 정도 빗발이면 한참 기세를 올리다가 멈춰도 “그래 너 참 세다” 해줄 텐데
봐주지 않더라. 비 좀 와도 괜찮지만 그건 정말 너무 했거든.
토란잎에 구르는 방울 돌아볼 만큼이든지
“아마도 빗물이겠지”라고 둘러댈 정도면 됐지
그렇게 험하게 나올 건 없는데 말이지.
사천에서 비 맞으며 내렸는데 서울 돌아오니 비 그쳐 있더라.
딱 하룻밤만이라서 헤매다가 허비하지 않으려고
아는 데랍시고 진주, 남해, 순천, 하동으로 돌았는데
그냥 수중 유영하다 온 것 같다.
{좋은 날 같이 갈래?
이 비 그치면, 강이 풀리면, 다랭이논 황금색으로 물들면...
그건 소망사항이지
시한폭탄이나 자동셔터처럼 일정시간 경과하면 꼭 일어나는 게 아니니까
그런 약속은 고맙다고 말하고는 잊어버리면 된다.}
광양이 건너다보이는 곳에 방을 얻었는데
바람 대단했지만 마침 발코니가 있는 데라서
날아가지 않고 밤바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순하다고 한번도 화를 내지 않는 건 아니거든
섬진강도 으르렁거리더라.
선암사 첨 찾아가던 날 속눈썹에 이슬 맺힐 정도의 안개비 내린 게 너무 차서
매화가 얼어붙고 그랬는데
다시 가서 승선교 아래서 사진 한 장 찍고 나니까 카메라가 젖어서 작동하지 않는다.
{이런 날 모습 남기기도 쉽지 않은데, 쩝...}
그래도 측백나무, 편백나무 냄새 맡으며, 서어나무 버짐 보며
댓잎 떠는 소리 들으며, 은행잎 밟으며 숲길 걸으니 좋다.
‘깐뒤’라고 읽은 사람이 용무를 마치고 나오며
“휴대폰 떨어질까 봐 걱정하니 해우소가 아니네.” 그러더라.
“언능 옷쇼이”하는 바람에 기사식당에 들어갔는데
오천 원짜리 정식 반찬을 읊어보자면-
{적어두지 않았지만} 시래기국, 삼겹살찌개, 전어밤젓, 홍어무침, 꽃게무침, 가자미구이, 계란찜,
생도라지, 토란줄기, 마늘쫑, 고사리, 참나물, 콩나물, 버섯볶음, 김치는 갓, 고들빼기 포함 네 가지.}
‘TV에 나오지 않은 집, 원조 아님, 할매집 아님’이라는 안티 찾아다닐 것 없다.
두 물 하나 되어 흐르는 게 ‘화개’ 뿐이겠냐만
그렇게 만났다가 헤어지고 모였다가 흩어지는 데에는 얘깃거리가 많더라.
그러니 ‘역마’, ‘천둥소리’, ‘남부군’, ‘태백산맥’, ‘지리산’... 생겼겠네.
그리고 ‘토지’... 해서 이번엔 평사리에 들렸다.
가도 그렇지만... 가보는 것이고...
서희 살았겠냐만 만나면 어쩌게?
이 나이에 오다가다 사람 두엇 만난다는 게
이제 와서 새 옷 걸치는 게 아니고
그냥 인연의 터럭에 올 몇 개가 티 나지 않게 묻어 섞인 셈이다.
좀 얽히면 어떠냐, 꽃 피고 열매 맺는 게 그래서 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