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맞이 8
1
가는 날 아침까지 비가 와서 안됐다.
그렇더라,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처럼
헤어지는데 하늘이 가만있기도 뭐한 모양인가 봐.
비 맞고 혼자 돌아와 빈 집에 들어오니 좀 그러네.
전날 저녁 쫄딱 젖기야했지만 잘 걸었다.
하피스트 동생이 팔 년 만에 첨으로 “브라보!” 소리를 들었다고 기뻐했지?
박수 받으며 살지 못했어도 크게 박수쳐주며 살자.
그렇게 기쁨 주며 기뻐하자.
2
몽골 갔다가 추석 연휴 전에 돌아오면 한참 혼자이겠다.
바람 맞으러 가니까 바람으로 빵빵하게 채워져 오면 허전하지 않겠지.
이 나라에는 바람이 필요하거든.
그 옛날 어긋나기 시작한 황색바람 같은 게 아니고
저 마른 뼈 골짜기에 즐비하게 누운 것들 살아 일어나게 하는 바람이 있어야 돼.
허파에 바람 들어가는 정도로 안 되고 오장육부, 신혼골수에 바람이 들어가야 산다고.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바람으로 오신 분을 만나야 돼.
그 바람은 몰아내는 분이라고.
가라, 껍데기는 가라, 모든 거짓을 쓸어가고...
오, 그래도 남는 것이 있는가, 잘 여문 알갱이로, 헐벗은 진실로 남게 하는 분이라고.
물과 영으로 낳게 하시는 분이라고.
바람은 눕히기만 하지 않고 밟힌 것을 일으키기도 하거든.
바람은 흔들기만 할 뿐 아니라 보듬어주기도 하거든.
{알아? 그 흔들음이라는 것도 뿌리내리고 꽃피우라는 격려와 도움이라고.}
그리고 말라 부서지고 흩어질 때쯤엔 길을 내어 하늘로 몰아가는 게 바람이라고.
그러니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이겠네?
3
기억나? 시작은 ‘헌화가(獻花歌)’였어.
그것이 필시 꽃이었던가,
절벽에 핀 한 송이
철쭉꽃,
그것이 필시 나비였던가.
그 꽃에 사뿐히 접은 나래,
길 끝나 절벽 있고
절벽 끝에 하늘 있느니
하늘 바라 면벽 천년 염화시중은
아직 눈빛이 찬데
그 미소 허공에 향기롭구나.
산이 산이 아니고 절이 절이 아니고
산 밖에 산이 있고 절 밖에 절 있느니
절벽에 올라
꽃 꺾어 오라시던 당신의 말씀,
그것이 정녕 꽃이었던가.
기르던 소의 고삐를 놓아야만
새처럼 날 수 있는 그 길,
그것이 필시 벽이었던가.
-오세영, ‘노인헌화가’-
4
그렇게 끝나지는 않지
깨달음이 벼락처럼 오더라도
갈 길 다 가고 할 것 다한 다음이더라고.
흐르는 것 어이 강물뿐이랴.
계곡의
굽이치는 억새꽃밭 보노라면
꽃들도 강물임을 이제 알겠다.
갈바람 불어
석양에 반짝이는
은빛 물결의 일렁임,
억새꽃은 흘러흘러
어디를 가나.
위로위로 거슬러 산등성 올라
어디를 가나.
물의 아름다움이 환생해 꽃이라면
억새꽃은 정녕
하늘로 흐르는 강물이다.
-오세영, ‘억새꽃’-
5
그리고 이제 ‘열반송’이니 하며 사기 칠 것 없고
한 번도 불러보지 않고서 ‘백조의 노래’니 하며 웃기지 말고
살던 대로 접자.
그렇게 못난 열매 몇 개 남기면 되지.
먹고 싼 자리에서 또 솟지 않겠는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 가을에 만나자.
잎에서, 꽃에서 열매로
성숙한 성인으로
긴 시간, 산고(産苦)의 시련을 겪고
온전한 생명체로 태어나는 너,
자연은 작은 꽃 한 송이에도,
작은 열매 하나에도
정성을 다해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아름다운 열매로,
정직한 씨앗으로
이 세상에 나온다.
우리는 이 가을에도
정직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인연으로 다시 만나자.
-박희연, ‘가을에 만나자’-
됐네 뭐, 그만 써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