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2
찬 비 내리는 아침, 섭씨로는 5도라나, 그래서 ‘비가 오도다’?
우습다, 남쪽에서는 이쯤만 돼도 ‘한파 주의보’로 호들갑이다.
남들 그렇다고 흉보고, 나도 춥다.
{흠, wind-chill factor를 고려하면 체감온도는 훨씬 낮은 셈이긴 하다.}
어제 이웃도시에 일보러 갔다가 약간의 입장료를 받는 정원에 들렀다.
“잘 오셨습니다. 단풍은 오늘 절정이자 아주 끝날 것 같습니다.
내일은 얼음비 내린다고 하니까요.”
절정, 영어로는? Climax나 peak 말고.
Consummation이 어떨까 싶네.
完成의 꼭지점 같은 것.
그러나 그 極點은 過程으로 형성된 것이고 推移의 한 부분이다.
마침표도 문장의 한 부분이듯.
Consummation 다음에는? ‘다음’이 없는 걸까?
법적 용어로는 밀고 당기는 오랜 협상 끝에 成事되어 계약이 맺어지는 것이나
남녀, 특히 결혼한 커플의 첫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끝’은 아닌 거네.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라고 그러면 할 말 없지만, 그렇지 연애와 같지는 않겠네.}
애기단풍? 백양사 가지 않아도 여기저기 쌨던데 뭘.
11월은? Almost. Consummation에 거의 다다른 때.
정희성 시인은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했다.
Araphao 부족이 그리 부른다고 했던가?
다 사라지기는?
비우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비움으로 충만을 향하여 나아가는 때.
수도자, 예술가, 무술 고수가 어떤 형태의 超越을 바라보는 때.
보이는데 잡히지 않아 안달하지 않고,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는 때.
기다림이랄 것도 없네, 悟, 見性, satori에 이름.
-가래질인지 하고 난 다음에 어떻게 나오나요?
-허허, 쌓은 덕이 많으면 발자취를 남기지 않을 수도.
아이들이 어렸을 때 차로 여행하노라면 수없이 묻는, “Are we almost there?”
반도 안 왔다고 할 것도 아니고, 이제 반의 반의 반만 남았다고 할 것도 아니고
“Yeah, almost.”
거의 다 왔음. {조금 남았지만 아무 것도 아님.}
다 왔냐 하면, “아직 아니.” 한참 남았냐 하면, “이미 아니.”
어두워질 때까지 얼마 안 남은 줄 알지만
빛을 보는 동안은 낮 아닌가? 이게 어딘데!
흙벽에 붙어 석양의 잔볕을 즐기는 파리처럼
아 좋구나~
사랑하는 이와 같이 있던 시간이 늘 좋은 것은 아니었고
편안히 갈 길을 일부러 힘든 길로 골라간 셈이기도 했지만
그와의 수많은 어긋남과 화해 없이 未濟로 남은 것들
잊으면 잊는 것이고 어쩌다가 떠올라 씁쓸할 수도 있겠지만
용서하거나 용서받는 것이 아니고 세월이 탕감해주었기에 홀가분해져서
12월에 새로운 愛憎을 추가할 것도 아니어서
마무리해야 할 때에 꼭 시작하는 기분 같아서...
Wood duck-원앙(mandarin duck)의 사촌-과 비단잉어가 서로 잡아먹는 관계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던져주는-그러지 말라는데도- 빵부스러기를 차지하느라고 몸싸움하더라고.
원앙 부부의 금실이 유별나다고? 아닌 듯.
짝짓기할 때 야단스럽기는 하지만, 동성친구와 어울리는 시간이 더 많고, 충절? 별로.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가 語錄에 남을 것도 아니고
거의 다 온 시점에서 “지금 좋아” 그러면 됐다.
松竹이라고 “獨也靑靑하리라~” 그럴 것 없네.
바랬어도 추레하지 않은 빛깔이 받쳐주니까 두드러질 뿐인데.
나태주 시인, 늘 교훈을 담아야 하는 착한 교사의 알량함이 흉하지 않은 노래에서
“내가 사랑하는 계절”이라 했다.
응, 나도.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달은
11월이다
더 여유 있게 잡는다면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다
낙엽 져 홀몸으로 서 있는 나무
나무들이 깨금발을 딛고 선 등성이
그 등성이에 햇빛 비쳐 드러난
황토 흙의 알몸을
좋아하는 것이다
황토 흙 속에는
시제(時祭) 지내러 갔다가
막걸리 두어 잔에 취해
콧노래 함께 돌아오는
아버지의 비틀걸음이 들어 있다
어린 형제들이랑
돌담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봉송(封送) 꾸러미를 기다리던
해 저물녘 한 때의 굴품한 시간들이
숨 쉬고 있다
아니다 황토 흙 속에는
끼니 대신으로 어머니가
무쇠솥에 찌는 고구마의
구수한 내음새 아스므레
아지랑이가 스며있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계절은
낙엽 져 나무 밑둥까지 드러나 보이는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다
그 솔직함과 청결함과 겸허를
못 견디게 사랑하는 것이다
Norwegian Wood 아니고, Japanese Garden 아니고, 서울숲 아니고, Green Mansions 아니고
秘苑? 그래, 내 맘에 남모를 정원에서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비온 후 안개까지 내려앉았던 날,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 같아
하늘빛 담지 못한 사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