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
초겨울도 겨울이다.
겨울의 시작이 겨울 아니겠는가, 시작했다면 겨울이지.
늦가을은 가을, 초겨울은 겨울, 어느 쪽으로 잡을지?
첫눈 왔다면 확실히 가을 오버이구먼 뭐.
기온으로만 치자면 “그걸 가지고?”라고 그러겠지만
여기도 으슬으슬, 장갑 끼었는데도 손끝이 시리네.
‘초(初)-’는 한자, 명사 앞에 붙여 ‘이른’을 뜻하는데 {초겨울, 초가을, 초봄, 초여름, 초저녁...}
‘늦-’같은 우리말 接頭語가 없을까?
‘초’는 또 ‘처음’이나 ‘첫 번째’의 뜻을 더하기도 하는데
초대면, 초짜, 초장, 왜 “초장 끗발이 개끗발”이니 “초장에 까부는 게 파장에 매 맞는다”는 말도 있잖아
초하루, 초나흘, 초닷새, 초벌로 쓰이기도 하고.
-초꼬슴이 뭐이게?
-모른다고 해두지.
-(김새구로... 투덜투덜) 꽃등이야.
-꽃등? 꽃무늬가 그려진 종이로 만든 등?
靑馬의 ‘봄소식(春信)’,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어쭈! 속으로만) ‘꽃+等’은 ‘맨 처음’이라는 뜻, 왜 ‘꽃잠(初夜)’이라는 말도 있지?
쓸데없이 길어졌는데,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초-’의 뜻으로 ‘꽃-’을 널리 사용할 수 있겠는지?
이를테면, “꽃겨울 날씨가 사납네” 식으로.
백당나무 잎만 보고서는 이제 가을로 접어들었는가 하겠다.
저녁 후 캄캄해져서 한밤 같이 어둔 길에 산책을 나섰다.
매운바람에 마른 눈이 쓰리고 눈물이 흐르는데, “응 뭐지, 이 냄새? 暗香浮動!”
나만큼 嗅覺이 발달되지 않은 사람은 구시렁구시렁, “갑자기 웬 문자? 병일세.”
“분명히 꽃 냄샌데, 치자꽃? 그럴 리 없지. 뉘 집에서 건조기 돌리며 芳香劑를 넣었나?”
아침에 냄새의 출처를 찾아 나섰다. {일없는 사람 하는 짓이라는 게...}
간밤처럼 강렬하고 명백하지는 않아 찾아질지? 킁킁, (저리 대고) 킁킁.
Eureka! {-까지는 아니고 “넓은 백사장에 밀려 들오는 저녁 조수” 같은 잔잔한 기쁨으로 “저거구나!”}
남의 집 담장 틈새로 들여다보는 동안 멍멍이는 사납게 짖어대는데
뭘 봤냐고? 아 글쎄 인동초가 꽃을 피운 거야. 아주 많이 달고 있더라고.
겨울에도 초록빛 놓지 않아 忍冬草인 줄 알지만, 꽃이 피다니!
{한겨울은 아니지만 꽃이 피었기에 생각이 ‘꽃겨울’에까지 이르게 되었네.}
꽃내음이 그렇더라.
작고 흰 장미가 향이 진하고, 보랏빛 장미는 우아하고
작약만한 진홍 장미, 탐스럽다만 향은 송이 크기를 따르지 않더라고.
梅香을 아무 데서나 맡는 건 아니니까
초봄에 조팝나무 꽃필 때쯤이면 돌아다니는 냄새에 “무슨 꽃?” 하고
좀 있다가 더 단 내가 나면 “라일락이구나!” 하게 되는데
1968년인가 휴가 나와 찾아간 동숭동 교정에서 “으응? 라일락이 벌써...” 그랬거든.
그게 최루탄 냄새였네. 봄날에 일없이 불쑥 솟던 시위, 그 전날 격렬했다대.
{좋은 냄새라도 진하면 골치 아프고, 나쁜 냄새라고 늘 나쁜 채로 남지는 않더라.
해서 얘긴데, 좋은 사람이 좋을 때는 꽃보다 사람이 아름다워, 아 그야 그렇지.}
남은 꽃들도 거의 스러지는 때.
세조 때 잘나가던 許琮이라는 사람이 ‘夜坐卽事’라는 시구를 남겼다.
滿庭花月寫窓紗 花易隨風月易斜 明月固應明夜又 十分秋思屬殘花
‘우리 옛 시’니 그런 책들 편집해낸 이가 終章을 “온갖 가을 시름, 꽃 보고 생겨나네”로 옮겼다.
김달진, 그분은 “한많은 근심스러운 생각은 쇠잔한 꽃에 붙이었다”라고 했고. ?
내 참, 뭘 모르실 분들이겠는가, 성의가 모자란 거지.
가을 餞別式이랄 건 없지만, 그래도 아주 가기 전에 들에 나가봐야겠다.
-뭐라 인사할 건데?
-또 올 거지?
철새 날아오듯, 또 가듯.
뭘 차려야 전별식이 되는 건데, 떠나보내고 나서 우리만 먹으러 가서 좀 그렇다만...
중국집. 결국 둘 중의 하나일 텐데, 고르느라 너무 애쓴다.
다 맛본 거니까 특별히 당기는 게 없으면 아무 거나 먹을 것이고
오늘만 날이 아니고, 오늘 이거 골랐으면 다음에 다른 걸 택할 수도 있는 것이고
짬짜면 있다지만 그렇게 이것저것 조금씩 할 게 아니고
오늘은 하나에 푹 정 쏟고 含哺鼓腹, 알았지?
그래서 “여기 삼선짜장 둘이요~”
-중늙은이는 이런 날 국물을 들이켜야 되는 건데...
-청장년이라고 그러기는 좀 뭣해서 중늙은이라 한 모양인데, 아니거든!
그냥 노인이라고. 이제 그런 줄 알아야 돼.
할 말 없다. 늦가을은 가을, 초겨울은 겨울이니까.
한낮에 보면 초록빛 더러 남았으나
새벽에는 서리 깔린 벌판이 허옇더라고.
마주 보지 않았다면 어찌 너라 불렀을까
나란히 눕지 않았다면 어찌 너로 남겠는가
그가 아닌 너, 네가 너라고 부른 나
그 우리 됨이 고마운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