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맞이 15 저녁놀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아휴, 그건 너무 심해.
한 번에 한 짐, 한 짐에 하나씩이지
가을, 노을, 강, 그런 건 같이 지지 못한다고.
회청색 생활한복이 어울리는 노인은 그립다 해도 회상이나 하는 거지
격렬한 사랑은 다가오면 치지 않으려고 피하게 되거든.
보고 싶은 사람이 빚 챙기듯 어쩌다 전화 한번 넣어주면
“별 일 없냐?”고, “늘 그래”라는 안부 교환으로 임무 완수한 듯 ‘쿨’하게 끝내고는
울지도 못하고 한 해 훌쩍 보낸다고.
그래 그냥.
그래도 해 넘어가기 전 한참은
{아니다, ‘잠깐’이겠네, 해 떨어지기 전 잠깐.}
스크랩에 던져두었던 기대와 소망 쪼가리를 건져내려고 뒤적이게 되더라.
장에 갔다가 족발 집에 들리는 바람에 에고, 좀 풀어지긴 했다만
거를 수 없는 의식 치르듯 뒷동산에 오른다.
있잖아, 노을, 황혼, 저물녘, 해거름, 땅거미, twilight, 뭐라 하든 그런 때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런 때에
그냥 방에 머물기는 좀 그렇잖아?
{저녁때라 몸 만들겠다는 이들도 집에 가고 조용해졌겠다.}
저, 그 ‘놈현스럽다’는 말 때문에 발끈했다는데
저는 저지, 저같이 말하고 저같이 노는 거지 화낼 일도 아니네 뭐.
기형도는 基形인지 畸形인지 판정이 곤란하면 奇形이라 하고
아무튼, 그냥 형도스럽다고 하고
{刑徒 중 하나라도 할 말 없지만...}
귀여운 정채봉은 채봉(彩鳳)스럽다고 봐줄까?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西行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燒却場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午後 6시의 참혹한 刑量
단 한 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時間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象徵을 몰아내고 있다.
都市는 곧 活字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速度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冊이 되리라.
勝負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기형도, ‘노을’ (부분)-
빈 배를 보다
외다리로 서 있는 물새를 보다
갈대가 소리 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다
섬은 아득히 멀고
뻘 위에 게 한 마리 썰물소리를
집게발에 매달고 서 있다
저들 눈에
나 홀로 있는 것도 들켰는가
붉은 노을이 뜬다
-정채봉, ‘노을’-
이제 광주리 인 여인 볼 수 없지만
아직도 귀갓길에 뭘 들고 가는 이들 있어 좋다.
식구와 나눌 건지 그저 연장통인지.
뉘엿뉘엿하면
어렴풋 보이고
뒤뚱거리는 게 흉이 안 되고.
운다고 안아주려면
조금 기다렸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