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소묘
내력
을유문화사, 정음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 같은 걸 60년대에 읽은 사람들은
‘사랑의 종말’ 이니 ‘사건의 핵심’이니 같은 작품명이 익숙할 테고
그런 식으로 제목을 붙이자면
흠, 요즘엔 ‘단초(端初)’라는 말은 안 쓸 거라 ... 그러니 ‘실마리’랄까
길게 풀자면 “‘지난여름 갑자기’는 이런 거였어요.”쯤 되겠다.
이미 젖었으니 비 피할 것도 아니고 가자면 가는 거지만
바쁜 걸음 아니라서 처마 밑에 들어섰다.
내딛은 김에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안에 기척은 있지만 피차 아는 체 안하고 시간 좀 흘렀다.
지게문 열리더니 찐 감자 사발이 나왔다.
그러고 한참이나 지나고
“옷 말려 가시지 않고...” 했다.
원인 없는 결과 없으니까 다 이유는 있다고.
밝히기에 궁색한 것도 있고 그렇지만.
우연도 아니고 필연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된 것
의지가 개입할 수 있었고 그러니까 항거할 수 있었지만
결과가 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 “어쩔 수 없었다”를 변명으로 채택할 게 아니고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 할 수 없으니까 “죄송합니다”로 푹 숙일 수밖에 없는 거라고.
그 왜 요즘 있잖니, 너무 안 된 아저씨와 당돌한 아가씨의 얘기.
{워낙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이라 그것도 이젠 얘깃거리 아닌 모양.}
잘 되겠냐?
그런 거지.
바람과 풀
잡지 않아서 떠났다고 그러고
흔들다가 그냥 가버렸다고 그러고
둘 다 섭섭하다니까...
조선 블로그
새들이 떠난 숲
조용해서 좋다.
돌아오리라.
제 집인데.
그런데 좀 심심하다.
내 다니는 길은 늘 그렇다.
잎 떨어져서 하늘이 많이 드러났고
작은 소리들이 의미를 전달하겠다는
과장스런 몸짓이 우스꽝스럽다.
일정
연초에 datebook은 받지만 기재할 것이 없다.
회합이나 약속이 없으니까.
약속하고 만나는 사람 있으면 좋겠다.
형편대로 사는 거니까 일 생기면 할 수 없지만
약속을 귀히 여기면 약속 못 지킬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틈나면 연락할 게, 바쁜 일 지나고 한번 보자고
그런 성의 없는 말들 예사로 주고받는 이들 없는 건 괜찮지만.
오늘...
아주 가는 것도 아니고 못 올 데도 아닌데
괜히 마지막인 것 같은 생각이 들고 해서 나가봤다.
향방 없이 나갔으니 사람들에게 떠밀려 다니다가
퀭한 눈으로 돌아왔다.
왜 들어가고 싶은 밥집마다 줄 서서 기다리고들 있는지.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재래시장을 둘러보았다.
몇 번 광어회를 쳐다보다가 생굴 한 종지 사들고 들어왔다.
지금 괜찮지 않거든.
부정의 부정이니까 ‘괜하다’는 뜻?
살아 움직이는데 공연(空然)하달 것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