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산행
자꾸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이라는 말을 붙이게 되면 마지막 사랑, 마지막 노래(Schwanengesang), 마지막 만남,
마지막 꿈, 마지막 저녁, 마지막 수업... 그게 좀 그런 느낌이다.
오늘은 마지막 아닌가? 오늘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날마다 마지막이면
‘마지막’이라 스산하고 애잔하고 ‘안습’일 이유 없겠네?
양수리 다리를 지나다가
마지막 산행? 그럴 리 없겠지. 그러면 안 되지.
북망산 가는 길 아닌 다음에야.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神)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돌아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김광섭, ‘산’ (부분)-
할머니들이 허리 비트는 운동하는 뒷산도 산이라 하면 몇 번 올랐다마는
가을이 가는데, 그리고 난 모레 떠날 건데
이러다가 산다운 산 한 번 못 오르겠네 싶어
아침 두어 시간 눈치 보다가 빠져나왔다.
점심은 먹고 올라가야 하니까...
살살 눈웃음 지으며 호객하는 아줌마 따라 들어가 산채 정식을 시켰다.
“어디 예쁜 만큼 손맛도 괜찮은지 봅시다.”
아, 꿀맛이구나. 게다가 도토리묵 한 사라와 밥알 몇 개 뜬 물 한 보시기까지 서비스로 나왔다.
차편 제공한 동행이 뭐라 했다.
“선생님 말 한 마디에 칠천 원 어치 더 나온 겁니다.”
{아,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는데 이까짓 게 뭘...}
절은 뭐 그렇다.
그 은행나무 하나 보러 온 사람에게는 아직도 잘 물들지 않은 셈인데
다른 나무들은 잎 다 털어 헐벗은 모습이더라.
{벗으면 생긴 대로...
사실이 진실은 아니니까 벗었다고 후한 점수 줄 건 아니다.}
정상 3.4 km에 소요시간이 네 시간이라?
‘왕복’에 그만큼 걸린다는 뜻? 지금 1시 45분이니까 캄캄해지기 전에 돌아오겠다...
능선 길을 탈 것인지, 계곡 쪽으로 오를 것인지?
‘전체’를 보자면 능선을 타는 게 좋겠지, 해서 그렇게 가는데
저쪽 길에서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여유롭게 들린다.
에고, 길 잘못 들었네... 갈수록...
아,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로 헉헉거리며 두 시간쯤 올라갔는가
{동행에게 여간 미안해야지... 청년이긴 하지만 간염 치료차 휴직 중인데 이런 데로...}
‘정상 0.9 km’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신갈나무와 산벚나무일 것이다.
맞대기만 했지 생명을 나누는 건 아니니까 연리지라 하지 못할 것이다.
내려오다가 쉬어가던 사람들 중에 한 마디 해준다.
“지금 올라가면 어두워질 텐데요...”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감만 못하니라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뭐 그런 경구들 생각나긴 했지만...
난 뭐 “정상에서 만납시다”를 외친 적 없고
계영배의 교훈처럼 칠푼이면 된 거니까...
그만하면 됐다.
우리 차림이 영 마뜩찮은지 위 아래로 훑어보다가 고개를 흔든다.
등산화? 값이 너무 세서 구하지 못했더랬다.
‘다목적용도가 아니어서’라는 이유를 댔었지.
뭐 이제 와서 어쩔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후회이지만...
난 정말 다목적용도로는 ‘딱’이었다. 그러니까 팔방미인이라는 얘기.
{내 생각엔 말이지. 앞으로는 일일이 밝히지 않겠음.}
별로 쓰임 받지 못했다.
저평가 우량주? 그 정도도 못 됐어.
해서 얘긴데... 아비보다 재주 많지 않은 아들아
하나라도 두드러지게 잘하면 된다, 아비는 ‘전문성’이 떨어져서 별 볼 일 없었구나.
{밤에도 별 볼 일 없었다.}
폼으로 등산화 신고 다니는 게 아니었구나?
하나 구하면 되겠네.
내려오는 길.
더 빨리 어두워지니까 오후 늦게는 택할 게 아니라는 계곡 쪽으로.
응? 그게 아니었구나.
내려가는 길도 무릎 아프고 헉헉거리는 코스인데 올라오자면 정말 힘들었겠구나.
남들이 걸어간 길은 쉬어보이지, 나만 잘못 택해 험한 길로 온 것 같지만
어디 쉬운 게 있냐고? 다 나름대로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올라가서 땀 닦을 때 내려와서 안도의 한숨쉴 때
성취감과 감사의 정으로 뿌듯하면 됐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란 공식은 없고
고생 중에도 기쁨이 있고
그런 낙역재기중(樂亦在其中)이야 ‘괴롬과 죄만 있는 곳’에도 널려 있던 걸.
때 맞춰 내려왔다.
6시, 어두워졌다.
또 가면 되니까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그때는 같이 가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