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설 (初雪)

 

1 하릴없이 꼼지락거리는 벌레들

 

첫눈 왔다고 몇몇이 호들갑 떨던 밤에

나는 앉아 밤샘했거든.

눈 와서가 아니고

시린 밤 그리운 임 때문도 아니고

시차적응이 안 되어 초저녁에 식탁에서 앉은잠으로 두 시간여 정신없이 헤매다가 일어나

날밤 지새운 거지.

 

그런 밤에...

왜 “별 하나에...”로 나가는 거 있잖아.

윤동주를 떠올릴 때마다 그보다 두 배도 더 산 게 창피해서

시를 인용하기도 그렇지만...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우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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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 사랑하는 이 따로 있어도, 음, 단 한사람뿐이라도

모두에게 잘해주고 싶거든.

그게 무슨 바람기? 아니고, 후회 같은 것

그만 두더라도 그렇게 끝내는 게 아니었다는 미안함 같은 게 있거든.

해서 ‘님’이 아니었더라도 비석에 새긴 이름자 쓸어보는 짬이 있더라고.

세월의 풍화(風化)가 덜 진행되어

패, 경, 옥 같은 이국 소녀 이름이 도드라진다고 해서

주책이니 꼴값이니 흉볼 것 없다.

안부 전할 길 없고 할 말도 없고

첫눈처럼 내린 이름들 곧 녹아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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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고사목 끝에 파란 색 흔적이 남은 걸 보면서

더부살이나 덩굴식물이 지주를 타고 올라간 건지

아니면 정말로 고목봉춘인지 잘 모르겠으나

아하 가버렸다고 단정하고 지운 이름도 꼼지락거릴 수 있는 거구나!}

 

꿈길이라야 노중에라도 만날 텐데

단잠 못 이뤄 애를 쓰니 이 밤을 어이 해.

{夢中逢故人 寤寐不忘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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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터무니없는 가산점수

 

곳에 따라 발자국 찍힐 만큼은 깔렸다고 하나

서울의 첫눈이란 날리다 말고

더 올 것이라면 비로 변해 질척함만 선사하고는

서둘러 퇴장해서 나온 줄도 모르는 단역배우처럼 미미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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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그러니까 기념비적일 이유가 없는데

‘첫~’ 자를 붙이면서 몸값을 올리더란 말이지.

그 ‘처음’이라는 게 덜 익고 서툴고 영양가 없고

도무지 값으로 칠 게 아니라서 in-valuable? price-less?

 

첫사랑은 풋사랑

단물 없고 떫기만 해서 삼키지 못했던 과일.

 

정실, 청탁, 뇌물 수수, 권력형 비리

터무니없는 가산점수로 모셔온 가짜 학위 소지자.

그래도 인기는 괜찮아 재임용에 탈락된 적 없이 끝까지 가더라.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씀도 있잖니?

또 그렇지, ‘처음’이 있으니까 무엇이라도 전개되는 거니까

습작도 없이 ‘백조의 노래’가 나오겠냐?

백미(白眉)는 솜털이 진화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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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눈이라는 게 정말 처음은 아니거든.

해마다 오는 거니까.

그렇다고 ‘그 해의 첫눈’이라고 그러지는 않고

그냥 첫눈으로 쳐주더라고.

 

다들 처음이 한번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라니까.

처음을 여럿 두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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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삼십 년도 더 됐지.

이렇다 할 것도 아닌데 신춘문예(1975년 한국일보)에 당선되었고

그 후로 아주 잊히지 않은 시가 있다.

 

     하릴없이 숫눈발 속에 다시 서노니 初經의 비린내 풋풋한 순수함이여. 너의 深部에 언제나

     깊고 어둔 발자취를 남겼으되, 이 눈길 위에 다시 새로운 나의 발자국. 오오 片片으로 흩어

     지는 하늘의 全身이 흰 북소리 둥둥 울릴 때 過去가 어찌 남김없이 용서받고 기억들이 어찌

     어김없이 慰撫받느뇨.

 

     모든 만남은 언제나 영원한 첫 번째 만남이듯 흰 눈썹 부비며 낯선 未明의 거리를 가노라.

     미진한 기억 속에 흰 북소리 낮게 疾走하고 빈 나무 등걸은 바람에 부풀면서 시간 바깥으로

     무수한 기억의 休止符를 날려 보내도다.

 

     해마다 한차례 心靈 속에 하늘이 갈갈이 찢어지나니 묵은 기억의 모서리를 이지러뜨리며.

     未知의 경험 속에 나를 미끄러뜨린다. 새로운 시간의 숫눈길 속에 그날의 풋풋한 순수로

     流入하리라.

 

       -김은자, ‘초설(初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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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타샤, 멧새 소리, 국수

 

그 태껸 도복 입고 다니는 이는 “내가 앙드레김입네다” 그래야 폼나지

봉남이가 뭐냐?

그렇게 ‘기행(夔行)’-조~심 조~심 징검다리 건너듯♪-이라는 이름이 별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백석’이라야 알아듣겠지?

 

잔가지 부러지는 소리 날만큼 바람 불거나 눈 내리는 밤이면

“아아 백석!”이 공식처럼 되었다.

 

‘순자’-順子, 난 ‘淳慈’가 좋더라-보다 더 나을 것 없는 ‘나타샤’가 왜 그리 보고 싶은지?

흰 당나귀 타고 자작나무 숲으로 같이 들어갈 그녀는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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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있지.

처마 끝에 명태를 말리고

명태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더라는.

웬 멧새 소리?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明太)다

     문(門)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백석, ‘멧새 소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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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보니 국수 생각도 난다.

옆구리 시리지는 않지만 배는 고프니까.

때 아니어도 국수를 삶는다.

동치미 없으니 김치말이라도.

 

그거 정말 길다.

다 읊을 수 없으니...

가위질?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백석, ‘국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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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는 길어, 길면 기차, 기차는 빨라...

그렇게 긴 밤도 지나고 새벽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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