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밤에 비트겐스타인과 함께
1
탈출. 참 듣기 좋은 말.
시도가 번번이 실패하기도 하고 과정은 힘겹겠지만
아, 탈출!
벗어나고서 불러보는 이름.
참 아름다운 말.
매이지 않은 사람은 놓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냥 그렇게 사는 사람은 매인 사람처럼 해탈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것보다야 못하지만
못하다고 못살 것은 아닌 사람은
아무래도 괜찮다.
그에게 희망은 ‘여기-오늘’과 다를 ‘거기-올 날’의 환영이 아니고
이 자리에서 지금을 견디는 게 아니라 누리게 하는 힘이다.
그런 이에게 무슨 탈출이 필요하랴, 자유자와 해방자에게.
Che Soave Zeffiretto (Gundula Janowitz & Edith Mathis)
올리비에 메시앙은 포로수용소에서 운 좋게(?) 파스키에 삼중주 단원들을 만난다.
바이올린, 클라리넷, 첼로, 거기에 자신의 피아노를 합하면 사중주가 되겠나...
그렇게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가 태어났다.
1941년 1월 영하 30도 눈으로 덮인 수용소, 오천여명의 포로들이 듣는 가운데
갖춰진 악기로도 아니었지만 초연이 이루어졌다.
빛.
끝, 새(鳥)와 새(新), 시작...
Olivier Messiaen, 'Quatuor pour la fin du Temps'
II. 'Vocalise, Pour L'Ange Qui Annonce La Fin Du Temps'
(Bernard Haitink, Cond. Royal Concertgebouw Orchestra)
Interlude
달밤. 뭐 달은 보이지 않지만...
보름이 되면 도지는 Luna-tic이라도 그런 음악 들으면 광기를 다스릴 수 있으니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중력 없이 거니는 중.
2
달밤에 늑대와 함께 춤을? 아니고,
어쩌다가 비트겐스타인(Ludwig Wittgenstein)과 함께 밤새고 말았다.
오랜만일세.
메시앙을 듣다가...
그렇게 전쟁이라는 극한상황 속에서도
살아남느냐는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듯이 딴 생각에 골몰했던 이들 꼽아보다가
피타고라스, 데카르트... 그리고 비트겐스타인.
{이제야 Reader's Digest 풍의 요약 해설서 따위가 워낙 많이 돌아다니니까
전공자가 아니라도 동네코흘리개 이름 부르듯 ‘비트겐스타인~’ 그러지만
그게 어디 함부로 부를 이름이라고.}
비트겐스타인은 일차 대전 중 종군하면서 조금씩 남겼던 메모를 모아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라는 책을 내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생전에 ‘책’이 될 만한 두께의 유일한 출판물이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를 Kant 이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꼽기도 한다.
{그러면 Hegel은 건너뛴다는 얘긴데...}
그를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초청했던 러셀(Bertland Russell)은
논문은 그렇게 경구(aphorism) 스타일로 쓰는 게 아니라고 타일렀지만
이미 완결된 것을 무너트릴 수도 없는 것이고.
{내가 토막토막 자르듯이 쓰고는 부연하지 않는 것이 그의 영향이라 할 수는 없다.}
비트겐스타인을 케임브리지에서 가르치게 하자면 학위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미 발표한 Tractatus를 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해도 충분하다는 무어(G. E. Moore)에게
그는 “어차피 아무도 모를 내용이기는 하지만...”이라고 위로했다고.
비트겐스타인은 그의 Tractatus가 사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였는데
올라간 다음에는 사다리가 필요 없으니 버려도 된다고 하였다.
뿐더러 그것은 전래의 모든 철학적 난제를 해결했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야, 그가 ‘천재’이기는 했지만 철학적 전통에 대해서 워낙 무식했기 때문에 가능한 코멘트였다.
후에 그는 그의 초기 입장을 철회 내지는 참회하는 입장으로 다른 사고 유형과 준범을 제시했고
그렇게 진행된 변화의 결과를 ‘후기 철학’으로 부르기도 한다.
시작은 이러했다:
「세계는 모든 사태(Sache, case, state of affair)이다.
세계는 실체가 아닌 사실들의 총합이다.
세계는 사실들로 나뉜다.」
그것은 세 개의 G음과 한 개의 Eb음으로 시작하는 ‘운명’의 두드림이나
“나를 이스마엘이라고 부르라”는 ‘Moby-Dick’의 모두(冒頭) 만큼이나 요란하다.
그렇지. ‘것’이 아니라 ‘일’-혹은, ‘일어남’-이 세계를 이루는 벽돌이지.
여기서 뭐 그의 ‘가르침’을 소개할 건 아니니까...
다소 부유했던 그-부모-의 집에는 브람스, 말러 등이 드나들었고,
그는 받은 유산의 일부를 릴케나 트라클(Georg Trakl)에게 희사하기도 했다.
5남 3녀의 동기 중에 형 셋이 자살하고, 피아니스트 형은 전쟁으로 팔을 잃기도 했다.
{라벨은 한 손을 잃은 피아니스트를 위해 따로 곡을 만들기도 했지.}
에이, 이런 얘기나 늘어놓자는 게 아니었다.
한 밤 옛 친구와 잘 놀았다는 얘기야 한 줄로 족할 것이었는데.
3
웃기는 제 자랑 같아서 좀 그런데...
아주 먼 옛날얘기니까 의미 없는 회상이라고 치고.
내 시험답안지나 기말 리포트를 보고서 “잘 썼다”고 그러지 않고 “감명 깊었다”고 말씀하신 선생님들이 계셨다.
김규영 교수님, 이한조 교수님, Arthur Gibson 신부님, Gregory Baum 교수님, J. J. Farris 교수님,
Ernst Best 교수님, David Demson 교수님.
김규영 선생님은 그깐 학부 3학년 학생에게 깊이 허리숙이며 인사까지 하셨다.
이한조 선생님께서 비트겐스타인을 소개하시던 학기의 기말고사에서 학생들은 시험 보이콧을 위협했다.
“시험문제를 다시 내든지, 텀 페이퍼로 대신 하든지...” 그러며 모두들 나가버렸다.
한 사람이 남아 사쿠라가 되었지만...
학점에 그렇게 반영될 수 없어서 그렇지 돌려준 답안지에 적힌 점수는 150점이었다.
사방에 느낌표를 달고는 마지막에 “감사합니다. 감동했습니다.”라는 붉은 글씨 논평.
유학 초기에도 ‘영어를 잘 못하는’ 학생이 어떻게 사고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기이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았다.
그런 은사님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고 지나갔다.
그 후 이렇다 할 발전이 없었다.
다 시시해졌거든.
{연애소설이나 쓰겠다고 그랬는데, 그게 잘 안 됐다.
종교란 사랑이야기 아니던가.}
첫사랑을 조우한 듯 어디서 튀어나온 비트겐스타인을 붙잡고 하룻밤 즐겁게 춤추고
늘어진 김에 넋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