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1)
1
적당히 침울하다가 맨송맨송 모드로 서둘러 재진입하는 조문객들처럼
동짓달 해질 무렵 강둑에 앉았던 이도
탈탈 털고 일어날 때는 입가에 웃음 달더라고.
그러니까 다들 그렇게 보이는 만큼 슬픈 것도 아니고
슬프다고 그래도 벗어나지 못할 수렁에 빠진 것도 아니니까
울게 내버려두라는 이 건드릴 것 없고
옆구리 시리다고 잠깐 비틀걸음 된 게 흉볼 일도 아니다.
남편 반주로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를 부르던 여가수?
오래 오래 잘 살더라고.
슬픈 노래 부르면서도 즐거울 수 있거든.
2
“한 다리 두 다리 세 다리”로 나오든지
아님 원조 ‘저항가요’대로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로 뽑든지
“동지섣달 대서리”로 끝냈다.
그렇게 보통 동지섣달은 붙어 다니지만
그래도 이제 동짓달 지나고 섣달 되니까
정말 마지막인가 싶기도 하다.
‘스잔나’인가 하는 영화에서 리칭이 부른 노래를 정훈희가 따라했던가
“지는 해 잡을 수 없으니 인생은 허무한 나그네
봄이 오면 꽃 피는데 영원히 나는 가네.”
그렇게 아주 가면 정말 끝이게?
그렇지 않더라고.
끝이 오기 전에는 끝이 아니더라고.
수렴되긴 하지만 다다르지 않는, 무슨 이차함수 그라프의 끝자락처럼
그런가 싶어도 꼭 그렇다 하지 않을 만큼까지만 가더라고.
늦가을이라는 건 있어도
그러니까 아름다움은 가고 쓸쓸함만 남은, 서리 내린 벌판 같은 정경이라도
그건 아직도 가을.
가을이 머무는 동안 겨울이 오지 않고
겨울이 왔다고 해도 감지할 의식이 없으니까
가을이 가면 가는 거지만 그렇다고 겨울이 오는 건 아니라고.
그래도 ‘자연’에서는
봄이 오자면 겨울을 거쳐야 하니까
봄도 무엇으로라도 만들어야 생기는 거니까
지나가는 겨울은 있어야 하거든.
꽃눈이 형성되자면 일정기간(chilling period) 떨어야 하거든.
그믐 다음에는 초승이니까
이울음, 이지러짐, 비워짐, 스러짐에 서러워할 것 없다고.
3
‘마지막’은 절망한지 한참 되고서도 한 가닥 ‘행여나’를 접지 않은 이들의 거짓말
엄살이 고질이면서도 실은 한 번도 걱정해보지 않은 사람들의 상투어
거룩한 체념을 할 줄 모르는 이들이 무책임하게 내뱉는 의미 없는 말
아무도 마지막을 마지막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4
널뛰며 잘 돌아가는 임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Save the last dance for me” 그런다고 될 일 아니거든.
원망과 안타까움 담은 시선으로 구걸한다고 반전되는 적 없다.
지나간 마지막은 있어도 기다리는 마지막은 없네.
5
이것저것 쑤셔 넣었어도 입가심은 산뜻하게.
해서...
내 몸을 지나가는 빛들을 받아서 혹은 지나간 빛들을 받아서
가을강처럼 슬프게 내가 이곳에 서 있게 될 줄이야
격렬함도 없이 그냥 서늘하기만 해서 자꾸 마음이 결리는 그런 가을강처럼
저물게 저물게 이곳에 허물어지는 빛으로 서 있게 될 줄이야
주름이 도닥도닥 맺힌 듯 졸망스러운 낯빛으로 어정거리게 될 줄이야
-문태준,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가을강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