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기행

 

어두워 몰랐는데 버스에서 내려 나오니 푸슬푸슬 눈 내린다.

저거 환각제 분말 아닌가?

다들 -운전 길 험해지겠다고 걱정하는 사람조차- 일상과 다름 때문에 흥분할 것이다.

{눈이 첨 오는 것도 아닌데. 눈이 뭔지 모르는 것도 아닌데.}

다들 꿈꿀 것이다.

깰 필요도 없지만 깨도 꿈같고

{꿈같지 않으면 또 어찌 살겠는가}

꿈으로는 부족했던 시간을 꿈속의 또 꿈으로 꿈꾸며 꾸미고

이루어져야 할 것, 이루어질 것 아닌 이미 이룬, 누리는, 그러나 싫은,

그래도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인 꿈, 꿈조차 현실이라니 개꿈이겠네,

그런 꿈을 지우며 새 꿈으로 override하는 밤을 기대할 것이다.

{저런 식으로 내리는 눈은 오래 가지 않지

도시의 아침은 언제 눈 왔냐는 식으로 그냥 조금 젖은 시늉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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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일박하고 왔는데 그렇게 좋구나.

꿈꾼 것 같구나.

 

같이 갈 사람 없어도, 기다리는 사람 없어도

가서 뭐할지 모르고

갈 데 정하지 않았고

누가 물으면 이틀 사무실에 나가지 않은 핑계 댈 것만 마련하면 되니까...

그냥 큰 고개 넘고 싶었고 바닷바람 쐬고 싶었고

그러자니 강원도, 동해안, 속초가 된 것이다.

강릉, 묵호, 통천이면 또 어떻겠냐만.

 

1966년, 70년, 73년에 설악산 다녀온 후로 그 쪽으로는 첨이다.

{'잃어버린 십년' 그런 건 아니지만, 해외 복무 기간이 너무 길었다.}

저 옛적에 진부령, 대관령 말고

한계령, 미시령 그런 이름 나중에 듣고 가보고 싶던 참이었거든.

아니, 미시령 옛길이 아니라 터널로 가는 바람에 김새긴 했다만

나오자마자 울산바위가 인사하고

아 저기 바다 색깔 좀 봐, 그쯤 되어 “Connais-tu le pays~♪”가 요실금으로 새어나온다.

 

마실 다니듯, 뭘 아는 총각 시도 때도 없이 껄떡거리듯 걸핏하면 나다니는 사람에게야 별것 아니겠지만

아, 나는 남양주시 들어서서 한강의 물비늘 보면서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밥 푸는 놀부 처 뒤태 보고서 “형수님, 저 흥분데요.” 했다가 주걱으로 귀싸대기 맞았다지만

아, 난 정말 흥분돼요

속초 등대에서 “저기 먼 바다 외론 섬에~”를 볼 때는 깔길 뻔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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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츰 가라앉긴 했다만... 그래도 좋더라.

 

만날 사람 없었고 기다리는 사람 없었지만 가서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렇게 만나면 ‘관계’가 형성된다.

{그렇다고 다 길들여지는 건 아니지만.}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 만나 좋은 시간 가지면

좋은 시절로 자리매김하여 대뇌피질에 새겨진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이다.

 

좋은 곳인가?

산 있고 물 있는데.

그 산이 어디 여느 산 같아야 말이지, 설악산 몸통과 금강산 자락인데.

서해에게 미안한 얘기다만-때가 때인지라, oil spill...- 어디 속초 앞바다 같던가?

그리고 큰 산에서 내려오는 물들, 남대천이며 미리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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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 사람, 별나고 과도한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

자기주장과 자랑이 지나치지 않은 사람, 예의바른 사람.

{그쯤이면 됐다, 더 바란다고? 앓느니 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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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둘람에 짐을 풀었다.

‘아둘람’은 다윗이 그를 시기하는 사울 왕을 피하여 숨어있던 굴 이름으로

‘격리된 곳’이라는 뜻이다. 병으로 요양 중인 신 형제가 사재를 털어 마련한 휴식처이다.

{사재를 털 능력이 없는 사람은 그냥 즐기면 된다.

아방궁만한 부잣집 불타는 걸 보고서 아배 거지가 아들에게 그랬다지,

“애비 잘 둔 줄 알아라, 집 없어 불날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참 좋다. 몇 해 전 고성 산불로 큰 나무들은 사라졌지만 뒤에 대숲이 있고

반듯한 대지 천여 평이 설악을 바라보고 있고

백오십 년 된 고택을 개수한 데에 보일러, 온수 목욕, 고속 인터넷 있으면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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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오봉교회 장 형제와 다른 자매들이 들렸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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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교회는 속초 시내에서 30분쯤 떨어진, 송지호에서 조금 더 간 오봉 마을에 있다.

마룻바닥에 방석 깔고 예배드리는 시설이지만

압화(pressed flower) 장식과 통나무 성구, 기도제목이 열매로 달린 강단이 있다.

회중석은 시골무지렁이보다는 의식 있는 지식인들로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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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송지호 둘러 걸으며 철새 -오리밖에 없었지만...- 도래지 관찰하고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제일봉이라는 신선봉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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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조심 입산금지’로 지키는 사람이 있었지만 공손히 인사하고 통과.

{“다른 사람한테 걸리거든 내 체면 생각해서 들어올 때 사람 못 봤다 그러시오, 험험.”}

계곡 따라 화암사-별나게 ‘화엄사’를 지우고 ‘禾巖寺’라 개명했다-를 지나 ‘수암(秀岩)’ 가까이 갔다만

그만하면 됐다, 다른 할 일 많으니까...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는데 문전만 쓰다듬고 들어가지도 못한 셈이지만

{들어가고도 비처와 절정에 도달하느냐는 별문제이다.}

그냥 지도에 ‘우물 井자’ 표시해놓고 또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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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장 통에 있는 허름한 데서 감자옹심이 먹고

박 자매 댁/ 갤러리에 들려 압화 전시 둘러보고

찰옥수수, 송이버섯차 대접에 목걸이 선물까지 받아 챙기고 나왔다.

 

라브리(L'Abri) 공동체 가는 길에 헤매는 바람에 한계령 자락을 디디게 되었고...

어둑해져서 서둘러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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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지난다고 낙산사 들려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저무는 바다만 보았다.

아직 캄캄하지도 않은 바다를 집어등 켠 배가 밝히고 있다.

 

휴전선 뚫리면 고향 빨리 가려는지 함경도 사람이 많이 정착하고 아바이 마을을 이뤘는데

우리야 그저 가자미회 냉면 먹으러 간다. 아바이순대, 오징어순대와 함께.

 

버스 타는데 꾸러미가 하나 늘었다.

에고, 없다고 “없다”할 게 아니고 먹고 싶다고 “먹고 싶다”할 게 아닌데

그러고 보니 점심 먹을 때 괜히 “가재미식혜가 먹고 싶다”고 그랬구나.

장 형제가 어리굴젓과 식혜를 싸주었다.

 

귀로.

꿈이었나...

 

{설악산 한번도 다녀간 적 없는 이에게:

"다음에는 꼭 같이 오셔요." 그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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