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1.1

 

알 굵은 눈발 오래 날리는 저녁

나가지 못해 그냥 내다본다.

한 아이가 비탈길에서 미끄러져 내리다가 웃으며 일어난다.

 

그때 아이들은 불집게를 잘라 만든 스키를 타겠다고 언덕에 물을 부었고

어른들은 연탄재를 뿌렸다.

다라이를 이고 가던 영덕 엄마가 넘어져 구를 때에 아이들은 웃었는데

그 아줌마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아이들의 얼음지치기도 시들해졌다.

 

난 이제 눈 깔린 길로 다니지 않을 것이다.

{같이 가자고 그러는 사람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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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 방충망 뒤에서 뒷산 오르는 길을

 

  

1.2

 

꼭 가야하고

내 발로 가는 게 아니라면

안가겠다고 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숲은 사랑스럽고 어둡고 깊다.

     그래도 내겐 지켜야 할 약속들이 있으니까

     또 자기 전에 갈 길이 머니까

     그래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남았으니까.

 

       -Robert Frost,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last stanza)-

 

잘 데도 없고 자고 싶지만 잠들면 안 되니

자도 될 만한 데까지는 가야한다.

 

자면 죽는다고 그러지만

잔다고 죽는 게 아니고 자다가 깨지 못하면 죽는 것이다.

산 사람은 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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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약 먹으니 자꾸 졸렵다.

푹 자면 나을 거라고 그런다.

깨워줄 사람 있으면 그렇게 자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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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 Klimt, 'The Death Of Juliet')

 

 

2.

 

냉이국을 끓였는데 맛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때 그 맛이 아니네?

하우스 재배라 언 땅에서 솟아나는 기운이 배지 않아서이리라.

냉이가 냉이 맛이 빠졌어도 냉이라는 이름과 형체는 지니고 있구나.

 

부역한 이들이 켕겨서일까 점령군에게 호소한다는 말이

“공무원은 혼이 없다”였단다.

그러니 의지 없이, 명령과 프로그램으로만 움직인 로봇이었다는 탄식?

 

반야월이 짓고 남인수가 부른 “살아서 사람이지 사람이 아니외다”라는 노래가 있기는 했다.

그 전에 한하운은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나’)라고 절규했다.

 

그래도 그렇지, 청년들의 제일 희망직종인 공무원을 두고

저희들이 그렇게 비하하면 되는가?

 

공들인 냉이국이 맛이 없다고 그렇게 심하게 말하면 되는가?

{후에 콩가루에 묻혀 끓이라는 귀띔이 있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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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의사에게 가본 적 오래되었지만

사람들 앞에 나설 일이 잦은데 자빠져 있을 형편이 아니라서

이번에는 약도 지어오고 주사도 한 대 맞았다.

 

그래도 아휴, 코와 입 언저리에 온통 잔주접이 주렁주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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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내 속에 있는 네가 너 아닌 나를 두고 뭐라고 그러기에

네 안에 있는 내가 본래 그였던 나를 두고 그럴 수 있냐고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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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콜록쟁이 미미, 그리고 비올레타

세상 바뀌었어도 여기저기서 피고질 것이다.

어떻게 해줄 수도 없고...

 

살아있는 동안은 “Etardi”할 게 아니지만

그래도 불회귀점이라는 게 있고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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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동백

피기 전에 목 베임 당하기도 하지만

피고 지는 것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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