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다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옮길 수밖에 없었겠는데, 아하 그것 참...
Longfellow의 시구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을 어떻게 이해할지는 잠깐 덮어두자.
‘어머니’는 출구를 찾아서도 아니고 기억의 창고 밖으로 아무 때나 나오신다.
‘아버지’는 그렇게 움직이시는 존재가 아니지.
그럼 언제쯤?
기일, 생신, 그런 때야 오셔봤자 또 무게 잡으실 거고, 그러면 인사는 올리되 여전히 어렵겠네.
모르겠어, 왜 연말에 찾아오시는지는.
{그야 내 마음이 부른 거겠지 뭐.}
아버지는 두려워하면서 극복할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에 사랑할 틈을 찾지 못했는가 보다.
그러다가 아주 연약해지신 다음에는 조금 실망하면서 보호해드려야 하기 때문에
대등한 관계에서 사랑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그러니 생전에는 어머니와 함께 누리는 수준의 절대의존과 신뢰를 표현하지 못하더라고.
돌아가시고 한참 후에야 찾아오시는 아버지.
“용서하십시오”가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동안 그리웠습니다”라고 말로 할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줄 모르고도 사랑할 수 있는 걸까요?
그렇다면... 사랑했습니다, 아버지.
다 자랐는데 그런 것 같지 않은 두 아들
성탄과 연말 맞아 ‘집’에 왔다.
나는 사랑한다고 그러지만
과잉보호, 미덥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봄, 일없는 훈도(訓導)
뭐라고 좋겠는가.
아들도 넘어서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다가 따뜻한 사랑 나누지 못하고 또 한 세대가 가겠네?
연말에 찾아오신 아버지, 아니지 내가 부른 아버지
사랑합니다.
Astor Piazolla, Adios Nonino
(Andre Rieu w/Carlos Buono)
그리고 하늘 아버지 살아 계신지?
The Lord's Prayer (Our Father)
(the Bulgarian National Choir "Svetoslav Obreten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