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그림으로

 

탈레스가 만물이 물로 이루어졌다고 그런 건

그가 사방을 돌아봐도 물뿐인 밀레토스에서 살았기 때문이겠고

전혁림 할아버지가 파랑을 쏟아 붓는 것도 통영에서 살기 때문이리라.

베토벤이 스페인에서 살았다면 그런 음악을 내었겠으며

피카소가 독일에서 살았다면 그런 그림 그렸겠냐고?

누구라도 저 사는 때와 땅의 영향을 받아 삶이 빚어지고

그래서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Sein in der Welt)’라는 말을 주조했는데

그 세계라는 말은 정작 환경(Umwelt)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 환경을 그리고 노래하는 별난 재주를 ‘예술’이라고 그런다.

이렇게 나갈 필요가 없었는데, 좀 과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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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삼원색이라는 게 촌스럽거나 굿판에서나 보는 게 아니고

고상한 이차색을 만들어낼 안료쯤 되는 게 아니고

우리 삶은 섞이지 않지만 어울리는 그런 단순한 배합으로 이루어졌더라.

설빔 차려입고 한복 자태 뽐내며 돌아다니는 이들 봐서가 아니고

그렇잖니...

새 이엉 올린 지붕 위에 고추 널어 말리는데

배경이야 가을 하늘이니 오죽 파랗겠는가?

뒷동산에 산소 있고 그 밑에 비슷한 곡선으로 웅크린 초가집이 기우뚱한 듯하여

바치듯 옆에 세운 감나무에 빨간 감이 다닥다닥 달려있더라는.

과꽃, 맨드라미, 해바라기의 조합이 맘에 안 들면 금잔화, 깨꽃, 나팔꽃(Heavenly Blue)으로 해도 되고.

홍매와 산수유, 개나리와 철쭉이 같이 있어도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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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은 정열...이기도 하지만 아픔이겠고, 노랑은 환희, 파랑은 기다림

해서 얽히지는 않고 그저 점묘로 어울리는 그림이 사랑이겠네.

살아가기는 사랑하기이니까

삶도 삼색기 그리듯 쉬운 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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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다’라는 동사는 여러 파생적인 의미를 제외한다면

(1) 보고 싶어 그리운 마음을 품는다든지 사랑의 정을 품고 생각한다는 뜻과

(2) 어떤 형상을 그와 같게 그림에 나타낸다는 뜻이다.

같은 어원에서 (1)의 명사형은 그리움이 되고 (2)는 그림이 되었으니

그리움과 그림의 내적 연계랄까 그런 쪽으로 생각이 이어지는 것이 억지는 아닐 것 같다.

그리움 없이 그림은 생겨나지 않고

그림이 없으면 그리움을 담을 수 없다.

 

말이 그러니까 그리움(慕)과 그림(畵)을 묶어보았지

어떤 예술은 그리움 없이 가능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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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라고 다 꺾을 게 아니고

길 가는 여인 예쁘다고 함부로 품을 게 아니어서

욕망의 금제와 지연된 충족을 포상하기 위해서

사법제도와 윤리가 생겼을 것이다.

 

채워질 수 없음의 탄식을 담다보니까

시니 노래니 그런 것들이 남게 되었겠지.

 

그린비와 단미가 맺어지거나 가까이 있지 못하고

왜 아름다운 것들은 내 것이 아닌지

그리움은 그림에 담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림은 담았다고 남지도 않을 눈물단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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