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나 해보고서
1
한 뼘 볕뉘를 기다리면서 응달에 살 건 없어요.
별 뜻 없는 설핏 웃음을 큰 선물인 줄 알고서
날아간 다음에 하얀 그리움으로 애탈 건 없다고요.
말이나 해보고서 말로 잡지 못할 줄 알거든
그냥 잊어버리라고요.
“사랑은/ 말해버린 잘못조차/ 아름답구나” (김남조, ‘사랑의 말’ 중)
한번 말하고 나면 다시 말하기는 쉽고
여러 번 말했다고 흐려지거나 묽어지는 게 아니니까
말하고 싶을 때는 말하세요.
쓰고 싶거든 써서 보내고요.
{꼭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가만히 있고요.}
만년필도 예쁜 말이지만 졸졸붓(fountain-pen)은 어떻겠니?
한 바가지 뜨고 나면
한참 기다려야 하지만
마르지 않는 샘이니까
또 고이고 그런다.
2
제 집에 모시지 못한 다음에야
동안거에 나다니실 리도 없지만
날 풀려 나들이 철 되면
운수 행각이 여기 들리시기를 기대나 하겠는가.
시린 손으로 김장독 열 때마다
오시길 기다리며 몇 포기 담갔지만
가지런히 흩어지지 않고 포개졌는지
맛 들기 전에 군둥내나 나는 건 아닌지
한겨울 지나도록 뵙지 못할 줄 알았으면
늦김치 따로 해둘 걸 그랬다고 후회하든지
생각이 많다.
오기는 오실 건지
들리셨다고 한 상 차려드리게 될지
한 입 베어 무신다고
저리고 삭고 켜켜이 박힌 뜻을 다 헤아리실지
확실한 건 하나도 없지만
살얼음 걷고 겉쪽 찢어 맛본다.
아직 괜찮은지
올려도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