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thko Chapel에서

 

 

명시된 집행일을 통보 받지 않았다 뿐이지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니 갈 때까지는 할 것 다하며 사는 거지요. 이게 마지막 저녁인지 알지 못하니까 밥맛이 어떠니 투정도 해가며 심상하게 밥상을 대하고.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나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고요? 누가 위인전을 써줄까 봐서? 그냥 갈 데/때까지 가는 거지요, 뭘 모르고. 가는 동안 먹고, 싸고, 자고, 음, 폼나는 문화 활동도.

 

불로그 사업 접겠다는 통보 받고 “응, 어떻게 이 짐을 다 싸서 피난 가지?” 걱정하고, “우리 어디로 가든지 같이 갑시다, 먼저 자리 잡거든 주소 좀 알려줘요.”라는 쏙닥쏙닥이 우스워서 “흥 웃겨, 가긴 어딜 가, 그냥 다 버리고 그만 두면 돼.” 그런 얘긴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철학의 태두(泰斗)라던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나 피난 갈 때 청자백자니 조상의 위패니 원서니 그런 것들 안 가져갔다. 보따리에 기저귀 몇 개 더 넣게 되더라.”}

 

수지맞지 않는 건 가차 없이 버린다고 그럴 것 없습니다. 한 십년 잘 지내지 않았습니까? 정치적으로 편향된 신문과 딱히 코드가 맞아서는 아니고, 자본이 받쳐주는 만큼 ‘문화’ 쪽에 나름 신경써주는 셈이니까, canting dilettante(젠체하는 문화애호가)에게는 정자나무 아래가 되었던 셈이지요. 다른 사이버공동체처럼 야비한 댓글을 달며 다투는 무뢰한들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니 좋은 세월이었어요. <조선 블로그>에 감사하고, 또 지금 멀어졌다 해도 한동안 가까웠던, 그리고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는 동무들께 고마움을 표시하며 다들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고교 교훈이었어요-으로 잘 사시겠지요.

 

이 편지는 Houston, Texas에 있는 Rothko Chapel 마당에서 쓰는 겁니다. 누구에게? 금방 말했는데... 당대, 그러니까 한때 유희의 동무들께요.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로 눈에 밟히는 건 아니더라도, 또 이름-가상공간에서는 ‘필명(ID)’이 되겠군요- 불러 찾을 것도 아니지만. {에이, 그것도 성의껏 찾지도 않고 “못 찾겠다 따까리~” 하고서는 밥 먹으러 제 집에 갔다가, 내일 심심해서 고샅에 나오면 다시 만나 놀게 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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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하나로 이루어진 작은 건물, 문간을 지나면 팔각형의 방 하나.

벽면에 그림이 걸려있고 등받이 없는 벤치 몇 개, 그리고 깔개-방석- 몇 개.

도촬 절대불가, 안내책자에서도 내부 전경 사진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거기 좋아? 나도 가보고 싶어서.

-응 와서 뭘 하게?

 

아니, 저도 가고 싶어 갔을 텐데, 기대하는 게 있어 간 건데, 와서 뭐 하게라니?

그저 그렇다는 얘길 것이다. 광고에 혹해서 주문했는데 배달된 상품을 보고 실망스럽던 기억.

네게도 그냥 그러리라는 불친절한 충고.

 

무슨 ‘Á la recherche du temps perdu’ 식으로 기시감(旣視感), deja vu의 단서를 찾을 건 아닌데...

팔각형 건물로 치자면, 고등학교 시절 음악당과 갈릴리의 팔복교회가 생각나지만 분위기는 영 딴판.

작은 성소(聖所)? 나는 이년 동안 의자가 열두 개밖에 없는 예배당을 다녔는데, 그런 것도 아니네.

내부는 몽골리아의 게르(Ger) 같은 분위기, 천장 중앙에 채광창(採光窓)이 뚫렸고 팔면은 모두 벽화.

 

벽화라고? 그냥 단색 뼁끼 칠, 반은 검정색, 반은 보라색.

보라라고 해서 등꽃처럼 곱거나 고위성직자의 스톨(stole) 같은 게 아니고 검정에 가까운 칙칙한 색깔.

검정이라고 아주 새까맣기만 한 건 아니고 고동색이 스민, 광택은 나지 않는 묵색(墨色).

 

그 검정이라는 게 한 꺼풀 칠로 그냥 까매지는 게 아니더라고.

어둠 위에 어둠이 쌓여 밤(深夜)이 되듯이, 흑색(黑色)이란 덧칠하고 개칠하고 이겨 붙여 다른 빛을 지우고 덮고 차단하여 이루어진 것이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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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 내부에 있는 그림은 아니고, Rothko의 1960년 작품 

 

 

그 왜 ‘Fifty Shades of Grey’라는 거, 우리말로 ‘그레이 씨의 50가지 그림자’? 웃겨.

회색이라고 다 같은 회색 아니고 흑과 백이라는 극성(極性)의 어느 편에 가까우냐에 따라 무수히 다른 색조(色調, shade)의 회색이 있겠네, 거기다가 자동차에 칠하는 metallic silver 같은 것까지 더하면 이름 따로 붙이지 않았으나 ‘회색’ 한 가지로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정말 많겠네.

 

흑과 백을 어느 정도 배합하느냐가 아니고 완전한 검정, 절대 암흑이랄까 그런 것조차 그러네. 농담(濃淡)이 다르지도 않은 한 페인트를 시간차를 두고 칠하면, 묵은 까망과 새 까망의 차이가 나지 않겠어? 지층(地層, layer)이 다름을 구별하는데 억겁(億劫)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 검정 칠이라는 게 겁(劫)을 사이에 둔 건 아니라도 겹으로 칠하니까 켜(層)를 이루게 된 것.

 

한참 들여다보면 “뭐야, 존재의 심연(深淵)을 찾아서? 아니고, 저승길의 터널?” 그런 느낌도.

 

Mark Rothko가 이 따위 주절거림을 좋아하겠나, 버럭~ “누가 널더러 설명하랬어?”

뭘 알아서도 아니고, 설명도 아니고, 내 느낌이 그렇다는 얘기. 느낌 아니까.

 

사실 이런 류로 먼저 충격을 던졌던-‘먼저’가 논쟁의 여지가 있다면 ‘보다 세련된 강력한 주장으로’- Ad Reinhardt의 소위 ‘Black Paintings’이라면, “뭘 보지 말고 그냥 봐”가 되겠네. 예술은 예술이고 예술 이외는 다 예술 이외일 뿐, 예술은 예술이고 삶은 삶. 꼭 “Drinking and driving, do not mix” 취중 운전 금지 캠페인 같네. 그러니 어쩌라고?  이른바 ‘12가지 기술적 규례’라고 해서 “이건 안 돼”라고 규정한 걸 보면 기가 차다. No brushwork/ calligraphy, no sketching/ drawing, no forms, no design, no colors를 포함해서. 어쩌라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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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Reinhardt 작품, 굳이 이름 붙이자면 ‘Black on black’  

 

 

Mark Rothko는 그 정도는 아니었네. 아니, 예술지상주의, 순수파(purism)가 아닐 뿐만 아니고, 그는 추상주의자라고 불리는 것도 거부했다. 그는 색깔, 형상 같은 것들의 관계에 천착하지 않고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 비극, 황홀, 파멸, 절망적 상황 같은 걸 표현하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초월’을 추구했고.

 

‘거룩함(聖)’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러면 성당(聖堂), 사원(寺院) 등 이른바 성소(聖所)는 거룩한 곳? Rudolf Otto는 ‘거룩한 것(Das Heilige)’이라는 개념을 Numinose라고 명명(命名)하며 라틴어로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 일상경험에서 격리된 절대타자(絶對他者)로서의 신비, 으스스 두려우면서도 고마워 끌리게 되는 경험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치고-그게 아직도 가장 유효한 거룩함의 정의(定義)인지는 생각해볼 일-, 오늘 우리는 성당이나 사원에서 거룩함을 경험하거나 초월(超越)로의 통로를 발견할 수 있겠는지?

 

특정종교의 전유물로서가 아니라 모든 형태의 종교적 신념을 지닌 자들에게 잠깐이라도 안식처나 구도의 시간을 제공하는 기능을 Rothko Chapel은 하고 있을까? ‘죽기 전에 해봐야 할...’ 식의 리스트로 치자면, Rothko Chapel은 미국에서 꼭 가봐야 할 곳 50군데 중에 하나로 꼽힌다. 그게 유명한 화가의 역작-치사 저질 발상인데, 팔릴 리 없으니 값으로 치기는 그렇지만 Rothko의 다른 그림들이 거래되는 것으로 미루어보건, 한 판에 오천만 달러쯤 될까 싶은 그림들이라는 점도 감안하여-이라는 사실 때문에 관심을 끄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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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하나 건져가긴 해야 할 텐데...”

허전, 홧김 그런 무드로 담아가는 게 마당에 설치된 Barnett Newman의 ‘Broken Obelisk’

 

 

 

가만, 편지라고 하고는 혼자 주절주절, 그게 뭐야?

 

 

왜요, 와 보시게?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Rothko Chapel만 바라보고 태평양과 미국 대륙을 가로질러 Houston까지 온다? 그건 아니지요.

그렇지만, Rothko Chapel을 짓도록 후원했고 소장 미술품을 공익을 위하여 다 내놓고 전시하는 Mentil 가(家)의 거대한 Collection-무료입장-과 휴스턴 미술관-목요일은 무료-을 포함한 Museum District를 어슬렁거리는 것은 괜찮은 휴가계획이겠네요. 인근 Galveston으로 가서 습지와 바다를 보는 것까지 포함한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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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하나로는 안 되어 일대 건물들 몇 개에 산재되어 있음.

소장품이 워낙 많아 전체의 15% 정도를 돌려가며 전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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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스턴은 고온다습해서 더러 rainforest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갤러리 옆에 있는 나무는 또 얼마나 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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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촬영, 안 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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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ett Newman의 후기작품이 전시중인데, “뭥미?” ‘뭐가 대단해서“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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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참 깨끗한데, 바람이 심해서 물결이 일면 바닥의 모래가 일어나 그런 색깔을. 

 

 

“미국 왔으니 Washington D.C. 가서 National Gallery of Art 전시품들을 두루 보고 가야지”까지 시간 쓸 수 있다면 수지맞는 거래라니까요. 수도(首都)에서 각종 국립 박물관들은 입장료를 받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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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정성으로 이런 봉사를...

따로 인사드리게 되지 못할 수도 있어서 애호가들께 미리... 그런 뜻으로.

그럼 한여름 건강히 잘 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