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白花) 시절
분홍 시대는 갔다.
{가게 되어 있으니까.}
매화, 벚꽃, 살구꽃, 복사꽃... 들여다보면 다르지만
여자라고 하면 다 그렇고 그런 여자지, 아비뇽의 처녀들 같은.
백화요란(百花燎亂)의 여름꽃밭 이전에 백화(白花) 시절도 있거든.
숨고르기 같은 걸까... 오월 산에서 피는 것들은 흰색이더라고.
이팝나무, 쪽동백, 층층나무, 국수나무, 백당나무, 산가막살나무, 고광나무, 귀룽나무,
쥐똥나무, 야광나무, 덜꿩나무, 물참대, 아카시아...
{이상 무순, 화내지 말라고...}
흰색도 무슨 ‘색’이지 무색은 아니거든.
보이는 것들은 무슨 색을 띠고 있다.
꼴과 색이 있으니 보지, 무색이라면 보지 못할 것이다.
빛이 없으면 색도 없을 것이다.
창조의 시작은 빛이었다.
“빛이 있으라” 하매 ‘운동(motion)’이 있었고...
색은 계(界)를 이루니라. {웬 계(戒)?}
흰 꽃이라고는 해도 그것들이 다 흰색일까?
크림색이라고 해야 될 것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아, ‘크림색’이라고 하면서도 석연치 않고 무슨 부끄러움 같은 느낌까지 스며들지만,
페인트 가게에서처럼 코드로 표시하지 않는 한
우리말로 색깔 이름을 붙인다는 게 참 어렵다.}
“가만 있자, 이게 흰색이구나.
너무 눈부셔서 빛(光)이긴 하지만 색으로 보이지 않는 게 아니고
크림색도 아니고, 눈빛(雪色)도 아닌
이게 바로 ‘흰 꽃’이구나!”
그런 꽃들도 있는데
꽃잎 끝 뒤쪽을 보니까
눈 밝은 사람에게나 뜨일 만한 불그스름함이 묻어있다.
“어, 이거 순백이 아니...”라고 말이 나가기 전에
그가 황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속속들이 살피는데도
귓불을 붉히지 않을 재주가 있겠냐고?”
“그건 ‘대발견’도 아니니까
남들이 흰 꽃이라고 하는 것은 다 흰색인 줄 알라”는
천둥치는 저녁.
폐인인가... 연휴 동안 방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나오는데
핑~ 어지럼증으로 잠깐 흐릿해졌을 때
산딸나무 꽃잎이 바람개비 돌 듯 한다.
하, 이런 먼지, 냄새, 소음 범벅의 시장통에도 하얀 꽃들을 단 나무들이 있구나?
마침 흰 쌀로 지은 맨밥 퍼먹고 나오는 길인데...
이팝나무가 초록 잎사귀 위에
하얀 쌀밥을 파실파실 피워 날아갈 듯
깔아 놓았다.
하얀 쌀밥이 바람에 날아간다.
-박정남, ‘이팝나무 길을 가다’ (부분)-
“꽃구경 간다고 헤매다가도 돌아올 때는 여길 지나쳐야 할 걸?” 그런다.
“얘는? 아, 일하러 간다니까.
평일에는 나도 일 나가야 먹고살잖니?”
그걸로 달랠 수 있겠는지?
{돌아다니다가 이런저런 꽃들 둘러본 것에 대해서도 변명을 준비해야 되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