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가 아름답기야 하지만
1
봄꽃들이 경염하는 게 춘추전국시대였어요.
장미가 오연히 모습을 드러내니 군웅할거가 종식된 듯합니다.
우리나라, 특히 서울은 어디를 가도 꽃이 많더라고요.
아파트 단지나 고급주택가뿐만 아니라 어디서라도 담장미가 한창입니다.
철물점과 고물상이 늘어선 거리에조차 장미 아치가 있으니까요.
그렇게 꽃들이 많지만...
꽃을 좋아한다고 아름다운 마음은 아니더라고요.
산보 길에 심심풀이로 꺾은 들꽃을 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내던짐을 탓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난을 키운다? 그윽한 기품을 가리는 명품 자랑과 지독한 집착이 있더라고요.
아, 혼동하지 마셔요, 꽃 좋아하는 걸 어찌 흉볼 수 있나요?
사람 사랑하지 않으면서 물건 좋아하는 걸 뭐라고 그러더라, 이상한 이름 붙였던데.
뭘 사랑하냐고? 사람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걸 누가 모르냐고요? 너무 평범해서 말 같지도 않다고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에게도 좋아한다는 감정은 있거든요.
히틀러는 그렇게 새를 좋아했다고 그러지요.
새를 기르는 취미와 정열이 특기와 조예의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는 이십만 명의 집단수용자들에 대한 학살 명령을 내리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보니까, 기르는 새들 중에 한 마리가 활기를 잃고 구석에 웅크리고 있네요. 병든 거지요.
정성을 들였는데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죽은 새를 안고 통곡했습니다.
한 마리의 새를 사랑하고 그것이 죽었다고 비통해하면서
이십만 명의 사람이 제 명령 하나로 죽어간다는 사실이 무슨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게
그게 무슨 사람의 마음이겠어요?
보르만이라는 나치 친위대 사령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장미꽃의 아름다움에 미친 사람이었답니다.
어느 날 아침 장미꽃에 입 맞추었습니다.
그 냄새를 맡고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몰아놓는 작업을 지휘했습니다.
장미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게 있으니까 그도 사랑하는 사람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 사랑은 사람 사랑입니다.
사람 사랑이라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똑같이 사랑할 수는 없거든요.
그래서 선택이 있고
선택은 가까운 사람을 만들고
그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그 관계를 지키면 그게 사랑이겠네요.
{선택은 의지 이전에 그냥 주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선택하는 게 아니고 뉘 집 자식으로 태어난 거지요.}
2
오십이 지나 처음 가져본 집
이십 년은 더 상환해야 하지만 ‘우리 집’이라 치고...
흩어져 사는 식구들 모이자니 처분해야 되겠네요.
토대부터 고치지 않고서는 매물로 내놓을 수가 없어서 공사 시작했는데,
집 둘레를 파헤치면서 장미들 다 뽑아버리려는 것을 결사적으로 지켰으니
칭찬해달라고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다시 못 볼지 모르니 이렇게 그림으로라도 새겨둡니다.
실은 오늘이 ‘법정’ 기념일이거든요.
{신고 접수가 잘못되었는데, 행정소송까지 해가며 고칠 것 있나요?
그냥 넘어간 것을 만회할 기회가 한 번 더 있으니까.}
속 인사는 공중장소에서 할 게 아니니까... 그렇지요?
3
오전에 외국인 노동자의 집을 다녀왔습니다.
사역의 규모가 그렇게 큰 줄 몰랐어요.
한 사람이 그렇게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놀랍고요.
오백여 명이 쉼터를 이용하고, 한 끼 밥으로 천 명분을 짓고, 병원 이용자가 이백여 명 되고...
{사역의 종류와 규모를 소개하자는 건 아닙니다만.}
현재 110만 명의 외국인이 들어와 일하고 있는데
저출산 국가에서 노동력이 점점 더 모자라게 될 테니까
외국인이 상주인구의 1/4을 차지할 날이 멀지 않다네요.
현재 이주노동자의 대부분은 열악한 환경에서 빨리 돈 벌어 금의환향할 날을 기다리고 있지만
사람 일 어찌 될지 모르는 거라서...
불법체류 단속을 피해 뛰어내리다가 다리가 부러지기도 하고
고용주에게 맞아 병신이 되기도 하고
모은 돈을 도둑맞고 자살하는 이도 있고...
그거 말로 다할 수 있나요, 그런 이들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람 사는 세상에서 늘 있는 일이지요.
냄새에 약한 사람인지라 두어 시간 거기 머물면서 골치로 시달렸지만
채 꺼지지 않은 불에서 힘없이 피어오르는 연기 같은 사랑 감정의 스멀거림이 있었어요.
한낮인데 방마다 이마 찧을 만큼 낮은 천장 아래 수십 명씩 누워 있다가
공짜로 먹고 자는 주제에 인사는 해야 되겠어서 상반신을 일으키는 사람들
개중에는 거기서 그렇게 오년을 산 이도 있다네요.
아름답지 않은 풍경인데
희망과 생기라고는 티끌만큼도 남지 않은 얼굴들인데
{에고, 내가 별나서 그렇지만} 그 냄새 하며...
그런데요, 사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고 노래까지 만들어야 했는지...
아름답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는 건지...
탁월을 흠모하는 게 죄는 아냐, 좋은 거야 좋지.
그저 그런 것, 빼어나지 않은 것, 가물가물하는 것, 돌려줄 게 없는 것들은 사랑할 수 없을까?
{큰사랑의 예를 든다고 성인의 사랑, 위인의 사랑을 열거할 게 아니고
우리의 사랑 비록 작은 것이라 해도
그 반짝이는 것들, 글썽이는 것들 모으면 빛날 텐데요.
이북에서는 전구를 불알이라 한다던가,
샹들리에 불 하나씩은 작아도 모아 놓으니까 떼불알, 제법 환하던걸요.}
장미가 아름다운 건 사실이지만
장미 아니라고 못난 것도 아니고
장미도 제 철이 있는데 정원을 장미만으로 채울 것도 아니고
장미가 지고서 가버린 걸 슬퍼할 게 아니고
장미 말고 돌아볼 게 많은 정원에서 땀 흘려 돌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