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기로 한 날
노땅이 아는 데라곤 종로통밖에 없다고 해서 “그 왜 우미관 있었던 골목에...”에서 만나기로 했다.
막힐 것 예상하고 먼저 나왔더니 약속시각 훨씬 전에 닿았다.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소리:
“어제 그렇게 헤어지고 사우나를 가지 않았겠나?
아 웬 배불때기가 들어오면서 ‘김 시인 웬일인가 여기서 다 보고?’ 하지 않겠어?
날 두고 그러는가 하고 창피해서 숨어버리고 싶었는데
꼭 그같이 생긴 영감이 일어나며 ‘어이구 박 시인 오랜만이네’하며 아래위로 털렁대고...
내 참, 그래 그 꼴에 박 시인, 김 시인 해야 하는가? 시인이 뭐 사장도 아니고...”
시집보다 시인이 더 많다는데...
거 뭐냐 옳지 ‘전업시인’이라고 하나, 그들도 예전보다야 살기가 낫겠지.
그래도 시집이 사천 원에서 육천 원으로 올라 오래 묶여있는 동안 다른 물가는 몇 배 뛰었으니
상대적 박탈감은 더 하겠네?
요즘이야 모두 셀 폰을 가지고 다니네만 그 왜 레지가 큰소리로 “김 사장니임~?”하던 시절 있었지
“김 시인님, 전화 왔는데요~” 그러면 나도 돌아볼 것 같아.
나도... 흠, 발표작은 없다만 음유시인 아니겠나?
{사회적 책임 없이 돌아다닌다는 뜻이네, 삐죽거리지 말게.}
실은 내게도 노래가 하나 있다네.
옛날 옛적에 ‘헌화가(獻花歌)’를 지었던 노옹(老翁)처럼
나이 들어 뭘 몰라서도 아니고 뻔뻔해져서도 아니고
힘쓰는 아랫것들도 못하겠다는 일을 저라고 잘할 것 같아서도 아니지만
살만큼 살았는데 목숨 거는 일이 대순가
“A thing of beauty is a joy for ever”라며 벼랑에 핀 꽃에 손 뻗치는 게지.
바칠 임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 변덕 맞추는데 보람이 따를 것도 아니고
소몰이꾼에게도 꽃이 예뻤던 것이고
아름다움에 목숨 내놓지 못하는 이들이 우스웠던 것이고
그래서 해내고 나니 제가 보기에도 장한 생각이 드는지라
노래 하나 남기고 싶었던 거디었다.
닿지 않는 데 피어있는 것 말이지 내 손에 들어와야 할 것도 아닌데
그 닿지 않음 때문에 안달하다가 또 시들해져 잊어버리기도 하고 그러는데
바람 방향 바뀔 때에 더러 향기 예까지 흘러와 닿으면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일 생각나서 울적하고 그랬네.
익숙한 것 잃어버려서도 아니고
해보던 짓 하지 못해서도 아니고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안 된 게 아쉽고
아직도 될 것 같은데 기회를 주지 않아 섭섭하고
그러는 동안 어제하고 오늘이 또 다름을 느끼는지라
전성시대의 추억도 없이 그냥 가는 거구나 라는 비감.
그나저나 이 사람 왜 안 오는 거야?
제가 무슨 고도도 아니고.
옆 테이블은 언제 비어졌는지.
내가 몰라 뵈어 그렇지 시인 맞겠지 뭐.
시집 없는 시인도 몇 개는 건졌을 거다.
제대(祭臺) 없는 제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삶이 성전이고 마음이 제단이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나를 바라보는 여자를 바라보며 그대가 입은 건 태피터
시골 여관방 커튼은 다우다, 그게 그거지만...
그런 생각 같지 않은 생각으로 생각함을 생각하다가
일어선다.
아무래도 오늘이 아닌갑다.
인사동이 코앞이긴 한데
이주노동자 귀국선물 파는 거리를 어슬렁거리면 또 뭘 하겠냐는.
밥집 떠난 피맛골 걸어 밤이면 치열한 전장이라는 광화문에서 오호선 탄다.
집에 일찍 들어가기도 그래서 잠깐 머뭇거렸다.
왜 맞을까 왜 맞을까 원인은 한 가지?
{'빈대떡 신사' 가사에서}
그게 아니고 하늘이 불량해 뵈니 쏟아지기 전에 어서 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