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도에서 1

 

찌푸린 하늘, 젖어서 더 푸른 벌판, 붉은 뱀 기어가듯 산등성이로 오르는 길

그렇게 몇 시간 달렸다.

{참 오랜만에 밖에 나왔구나.}

 

시애틀에서 잠 못 이뤘다고?

안면도에선 그런 일 없을 거야.

편한 잠(安眠) 자겠더라.

 

문이 좀 열렸던가보다. 바다는 진격하는 탱크 같았다.

새벽녘에는 오래 보채다 지친 아기 울음 정도가 되었는데

소리야 내가 달랠 것도 아니고 문을 지치니 잦아든 거지.

새벽잠이 단잠이 되었으나 늦잠(晏眠) 잘 건 아니니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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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좋은 아침 백사장에 사람이 없네?

그야 뵈는 게 없으니까.

정충발사기 분무처럼 희뿌옇기만 하니까.

보자면 보이는 게 없고 보이지 않는다고 아주 어둡기만 한 것도 아닌

흰 창 드러난 눈 같은 박명(薄明)에

해무(海霧)까지 휘감기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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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갈매기가 가까이서 보니 아주 크네?

안개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접근할 때는 히치콕의 ‘새’ 장면이 떠올라 좀...

속사로 몇 마리 잡고 싶은데 좋은 카메라를 챙겨오지 않아서...

 

{근무처 직원 연수회 때문에 오게 되었는데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 같아 달랑 작은 디카 하나 주머니에 넣고 왔다가

널려있는 그림들 줍지 못하고 가자니 아깝다.

내 할 일은 첫 꼭지로 마쳤고 ‘가족’ 단합 때 계약직은 배제되어 자유시간을 얻었던 셈이다.}

 

들어올 때, 나갈 때, 머물 때

채울 때, 비울 때

나는 그냥 밀려다닌다.

뜰 때, 질 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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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물 빠지는 건지

물 흘러가며 골이 생겼는지

갯벌에도 모래밭에도 길이 있다.

공중에도 길이 있어

바람도 길 따라 다닌다고 그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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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답지에 길을 낼 수 있어서가 아니고

거기에 있는 길들 중에서 골라 디딜 수 있어서 좋다.

발자국 찍었기로서니 물 들어오면 지워질 테니까 자유롭다.

 

어륀지(?)라고 다 같은 게 아니고 한라봉도 있고 그렇듯이

조개껍질이라도 더 고운 게 있고 그럴 것이다.

찾아서 챙겼다고 해서 더 좋을 게 뭔지

모으는 짓 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바닥을 눈여겨 볼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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