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슴슴하게 먹을 갈고
또 물을 타서
엷은 먹보다 더 맑아 색이랄 것도 없이 된 걸로
생각나는 대로 그리고 화제도 적어놓고
알아보지 못할 사람에게야 낙관 남길 게 있나
선지 여러 장 버릴 것도 없고 마른 후에 겹쳐 그리면 된다.
그렇게 여러 벌 그린 것
엑스레이로 투시하면 다 나올 텐데
물 한번 들어왔다가 나간 자리에서 사람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발 없는 말 천리 간다니} 다리 없다고 못 갈 건 아니지만
{뱀처럼 저주 받을 일 없었는데도} 평생 배밀이로 다녀야 하는 건지?
길은 있던 것을 찾아낸 걸까 {finding이면 과학}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걸까 {making이면 예술}
길 있어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서갈까 할 것도 아니고
어디라도 가면 가는 것이다.
자취가 남았다고 해도 한 번 쓸어주면 사라지는데
{롱펠로우 할아버지, 시간의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다고?}
누가 따라올 것도 아니다.
그러니 친절한 척 ‘No Way Out’ ‘Detour’ 같은 사인 남길 것 없다고.
아침에 나올 때는 그랬거든...
진검 들고 첫발 디디는 이름 없는 무사처럼
기대와 긴장으로 시작하는 하루.
온갖 아픔 한 대접에 담아 단숨에 들이마시고 젖은 입술 닦듯
불행한 기억 지워버리면서
더 나쁜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최면 건다.
떨림은 불안이기도 하고 희망이기도 하다.
그렇게 많이 떨면서 나선다.
{두려워서는 아냐.}
그렇게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바다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상 사진들은 안면도 꽃지 해수욕장에서}
그러니까 나는 물결에 떠밀렸을망정 castaway는 아니었네?
이룬 건 없지만 잘 놀았다.
{내가 무사히 돌아간다는 건
어부 아저씨 바구니가 채워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