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면 어때

 

휴가 간 이들 많아 빈 사무실

할 일 없어도 시원한 게 어딘데 그러며 나와 꼬박 지켜 앉았다가

주말이 되니 가 있을 데가 없어졌다며

조금 어두워진 마음으로 나선다.

 

길 건너로 버스 네 대 지나갈 동안 타고 갈 방향으로는 소식이 없다.

막혀 못 오는 걸 어쩌란 말이냐.

홧김에 차를 사? 생각도 말아야지.

자가용은 막히지 않나? 저는 퀵서비스처럼 숑숑 빠져 나갈 수 있나?

 

기다리면 어때

올 줄 알면.

 

 

8080105.JPG

 

 

비 그친지 언젠데 은단풍 잎들에 달려있던 물방울 몇 개가 그제야 생각난 듯 떨어지다가

응? 한 녀석은 속눈썹에 내려선다.

깜빡깜빡 주르륵. 그러고 보니 이런 걸 두고 “아마도 빗물이겠지♪”라고 그런 거구나?

치켜다보니 까마득하니 솟았는데 수피는 별로다.

젊어 보인다는 얘기. 주름이나 생채기가 없다.

 

 

8080101.JPG

 

 

어쩜 여자애들 드러내놓고 다니는 다리가 그리도 깨끗한가.

긁힌 적도 없고, 하다못해 뭐가 나거나 모기 물린 적도 없네?

 

보기 좋은 게 맛도 좋다지만

흠집 없는 과일만 고를 것도 아니더라고.

{못 말려 극성들 제 꾀에 넘어가라고 일부러 벌레 파먹게 한 가짜 유기농 식품 말고.}

 

 

8080102.JPG

 

 

박형준 시인이 신춘문예에 당선(1991), 등단케 한 시 ‘가구의 힘’에서 그랬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 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어쭈 25살에? 그렇게 시인은 다 살아본 것처럼 애늙은이로 말하더라고.

새로 들일 것도 있고 도리 없이 바꿔야 할 것도 있지만

이사 횟수만큼 생채기 하나씩 새로 얹은 추억꾸러미 끌고 다니며 같이 나이 먹어간다.

 

{이거 뭐 곁가지네만, 박군, 우리는 제니쓰 라디오로 유엔군이 어디까지 진격했는지를...}

 

{그는 또 “空中이란 말 참 좋지요” (‘저곳’) 라고 그랬다.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라는 패러디도 뒤따랐다.

에휴, “공00 참 좋지요”는 아닌데 왜 한나라에서 희색만면인지?}

 

‘고물의 힘’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딱히 고와서도 아니고 사정없이 흉보는 사이라도 그렇지

오래 산 사람과 더 오래 같이 사는 게 좋은 거라고.

그렇게 익숙하다면 흉보지 않는 게 좋은 거라고.

 

 

8080106.jpg

Vincent Van Gogh 

 

 

고개 젖히고 오래 있을 수는 없으니까 운동하듯 아래로 꺾었는데

모니터용 안경을 바꾸지 않고 나왔나보다. 가까운 데 있는 게 잘 보인다.

꿈틀거리는 지렁이에 달라붙은 개미 몇 마리 “이게 웬 떡인데?” 힘겹더라도 놓을 수 없지.

들여다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 살자고 하는 일. 죽을 때까지는 살자고 그러는 일.

 

“버스 온다!” 그런다.

올 것은 오지.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8080104[1].JPG

 이수동

 

 

마포대교 건너가면서 생명보험 광고 사인을 또 보게 될 것이다.

 

 

8080103.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