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가고 1
1
그 참... 몰려드는 서늘한 바람에 물 맞은 개처럼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지나가는 아이 짧은 티 아래 드러난 배꼽이 오그라든 분꽃 같다.
태풍 ‘00호’라는 이름붙일 만하든지 그저 그만한 것이든지
센바람 큰비 한차례 다가왔다가 늦더위 씻어내면
“여름은 가고 꽃은 떨어지니”이다.
기대는 있었지만 약속한 건 아니니까...
그대와 함께 바다에도 숲에도 가보지 못했다.
여름 또 올 거니까. 여름 아니라도 되니까.
문제는 내일 일을 모르니까. 내일은 내게 속한 게 아니니까.
보지 못할 수도 있겠네?
이상하다. 집안은 아직 덥다.
머리를 구을 것 같은 복사열과 뒤통수에서 땀이 송송 배어나오는 것도 여전하다.
환지통(幻肢痛)인가?
2
광염(狂炎)이 수그러들자 옥잠화와 비비추가 꽃대를 다시 올린다.
선선해져서 살아나는 것들도 있고 제 때가 지난 줄 알고 비켜주는 것들도 있다.
“백일홍이라고 백일 피어있어야 된다는 얘기 아냐” 소리 듣고도 더 살아야 하는지?
{아직 나비가 찾아오는데도...}
해바라기는 들어찬 씨앗들이 무거워 힘겨워한다.
{직립원인에게는 머리가 큰 짐이다.}
어쩌랴 좋은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서 여름의 잔해를 서둘러 치워버리는 손을.
전성기는 쇠퇴를 전제로 한다.
가장 아름다운 때는 부패가 눈에 띄기 시작하는 때.
종말의 시작은 시작할 때이지만
극성기(極盛期)가 되어서야 눈치채더라고.
3
마루에 나란히 앉아 달빛에 옷자락 적시고 싶다.
간밤에 다 쏟아졌더라도 오늘밤에도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할 것이다.
사랑은 별만큼 많아 다함이 없을 것이다.
4
퍼붓다가 그친 비 다시 내리려하는 하늘 보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눈웃음 뿌렸다.
내리는 거니까
은혜이니까
선물이니까
좋고 나쁨 많고 적음 가릴 것 아니고
감사하다.
사랑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