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슬아씨 9 떠날 줄 알게 하소서
벌 내리듯 소식 끊은 이에게 반발하듯 모른 척하며
벌어진 사이가 바다 같다.
가정법 과거의 흔한 예문처럼, 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
다리 놓이지 않아서도 배가 없어서도 아니고
날개 달렸어도 뜻 없으면 가지 않을
저 건너보이는 섬
뿌리로 연결된 줄 알고 안심하자.
좋아 미쳤던 게 그저 그래진 날에도
손잡고 개여울 건너 언덕배기 오를 날 기다리기로.
공중에 비행운 사라지듯 지워지는 게 아니니까
일어난 일들은 흔적을 남기더라고.
한강에 배 지나간 자리라고 할 수 없는 거지.
사가(史家)라야 해석하는 게 아니고
선의를 지니고 보면 다 그리운 것들뿐이더라.
돌아보면 야단맞았던 기억뿐인데, 그때는 억울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빌고 그랬다.
이제 와서 비굴했던 모습 떠올리며 쓴 침 고이는 게 아니고
“그래도 그때 좋았어” 싶어 입가에 웃음 한 자락 걸린다.
좋았으면 좋은 것이고 그랬던 것 같지 않아도 곱게 덧칠하는 게 가을이니까.
“떠날 줄 알게 하소서”라는 기도
돌아올 의지 있는 사람이 하는 거야.
빈 바랑 폼으로 두른 것이 부푸는 건
다 놓고 떠난 줄 알았던 마음 조각이 붙어왔기 때문.
그럴 바에야 어렵게 떠나는 시늉할 것도 아니었는데.
떠날 줄 알게 하소서 (유자효 시)
잃을 줄 알게 하소서
가짐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잃음인 것을
이 가을 뚝뚝 지는
낙과의 지혜로
은혜로이 베푸소서
떠날 줄 알게 하소서
머무름 보다 더 빛나는 것이
떠남인 것을
이 저문 들녘 철새들이 남겨둔
보금자리가
약속의 훈장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