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1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이제 와서 귀향이라 하지 않겠다.
승리한 사람은 금의환향의 예식을 치르러 한번 들리긴 하겠지만
귀향은 위로가 고픈 이들에게나 필요한 곳이다.
패자부활전을 도모하는 사람은 고향의 흙냄새를 맡고 재충전, 재기하기도 했다.
{그 시절 뱀이 흙냄새 맡으면 다시 살아난다고 해서 뱀 잡으면 뽕나무 가지에 걸어놓았지.
간혹 소독약 봉지에 넣어 끈으로 매달아 두면 호기심 많은 이가 풀어 들여다보다가 자지러지기도 했고.}
세상은 죽음 때문에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실패한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얼마나 무시하는지 몰라.
삶을 승부로 여기는 동네에서는 패배에 냉혹할 수밖에.
탕자가 아버지의 집-제 집이기도 하네-으로 돌아가는데 뭐 그리 어렵겠는가?
하늘과 아버지를 뵐 면목이 없겠고
그리고? “꼴 좋다”, “내 그럴 줄 알았어”라는 시선을 감당하기 힘든 거지.
그래도 가서 살 수만 있다면?
고향이란 ‘예전처럼 될 수 있는 곳’이니까.
냉대했던 이들이 돌아서고는 사과할 필요도 없이 가까워지는 데이니까.
2
십년 동안 섬기던 곳을 오년 전에 떠났었다.
다툼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선선히 헤어진 후에 오해와 폄하가 따랐다.
억울하지 않으니 해명할 일도 아니었고.
특별한 화해의 노력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세월이 약이겠지요?
다섯 해 지나 첫 방문인데,
들어가는 골목, 후락한 대문... 에고~ 잠깐 한숨 새어나왔으나
다들 반겨주던 걸.
{잘 자라나는 나무들 보고 “저거 다 내가 심은 거야.” 그럴 이유 없는 거지.}
그게... 웃기는 해도, 악수 혹은 포옹으로 맞아도
있을 때 가까웠던 사람은 그럼에도 떨어져있었음을 미안해하고
“사람사이가 이런 게 아닌데...” 싶었던 이들은 멋쩍은 웃음 푸슬푸슬 날리고 지나가더라고.
{감동은 연출하는 게 아니니까.}
크다, 빛나다...라는 평가는 그 자체의 규모와 정도뿐만 아니라
관측자 혹은 의식하는 존재에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가장 아름답다거나 빛나는 존재로 여기는 것은
나에게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가까웠던 사람들은 살별의 주기처럼 가까워질 때에
{“그러니까 다시 멀어진다고 하더라도”라는 대목은 생각지 않기로}
빛남과 뜨거움을 서로 확인하게 되더라.
3
거기도 지나가던 데였고
돌아왔는데, 그러니까 낳고 자란 데로 왔는데
여기 고향 맞아? 그런 마음.
누가 날 좀 데리고 가줘.
하루 걸음에 밤나무골, 감나무골, 대추나무골... 다 들를 수 있는 데로.
송이버섯 숨어있고 독 오른 뱀들이 가실볕 즐기는 숲으로.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벗기고 있다.
-오탁번,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