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슬아씨 21 심추
늦더위가 머무적거리며 떠나지 않더라고 흉볼 건 아니지만
그 왜 삽상함이랄까, 오장육부가 시원한 듯하다가 눈이 시려지게 하는 공기 말이야
그게 좀 더디 온 거지.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가을은 깊었네! 그 평범한 말이 아주 괜찮게 들리는 거야.
보통 晩秋(만추)라 하더라마는 深秋(심추)가 더 듣기 좋네.
익어간다고 해도 되겠고.
익다가 타겠다?
그건 산야만 아니고 물도 그렇겠네?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라는 부담스런 구절도 꼬물꼬물 기어 나오고
그러면 또 그 양반 생각난다.
“에이 이 지지리 못난 찌질이 병쟁이야” 라고 욕해놓고 같이 울고픈
구겨져서 더 멋진 옷처럼 그 다리지 않은 얼굴 만져주고픈 사람의 말들이
똑 똑 떨어진다.
그러면 이제야 비로소 가을인 게야.
꽃잎 속에 새 꽃잎
겹쳐 피듯이
눈물 속에 새로 또
눈물 나던 것이네
-박재삼, ‘눈물 속의 눈물’-
에고 이 양반 참 화나게 한다면서
속상하게 칭얼거리는 아이 안아주고 싶은 마음 생기는 거야.
가을하늘의 거리감이라는 게 참 그래.
드높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높다고 멀지도 않은
만지지 못하는데 척척 감기는 그런 기운
여기 있는가 돌아보다가 아득함을 확인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박재삼, ‘아득하면 되리라’-
가을구름은 사나움이 가셨지만
그렇다고 더 친절할 것도 없는
구름은 구름.
곁에 있다는 건 무슨 의밀까?
-어린 아이가 천둥치는 밤에 무섭다는 핑계로 부모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엄마 젖을 만지는 것 같은 접촉은 없더라도
선친, 다른 그리운 이들 곁에 계신 줄 알고
생각나 슬퍼질 게 아니고 그렇게 계심이 확인되어 넉넉해지시길!-
인사는 그렇게 했는데...
미국 어느 원호병원에서 만난 노인은 몸만 아니라 정신도 많이 허물어졌지만
장진호 부전호 지역에서 퇴각하다가 낙오되었던 때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억했다.
아주 추웠노라고, 그래서 네 손가락, 다섯 발가락의 마디를 동상으로 잃었다고 그랬다.
그래도 살아남은 자들, 일사후퇴 때 가까운 자들과 더러 헤어졌고 그 후 모질게 살아온 사람들
나중에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러더라.
흘러간 세월이 길어지면서 무용담도 늘어가고 처절한 과장이 희화화(戱畵化)하던 걸.
아니면 말지 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지만
가을은 그런 게 아니더라.
첫가을에 만나고도 슬펐다.
-숲길에 둘 뿐인데 손잡고 걸으면 안 될까?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그러는 거지.
둘째 가을에 가까이 있는 줄 알지만 찾지 않았다.
셋째 가을에 위로가 필요할 때 연락이 없었다.
넷째 가을에... 가만, 맞나? 아직도 보고 싶다.
{제 편 얘기지, 관계있는 이들은 다 아프고 슬프고 서운하지.}
As time goes by...
그렇다니까.
가을엔 그런 게 흉이 아니라니까.
따질 것도 없다니까.
{가을이 깊은 만큼 마음도 깊어져 고인 것들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