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닥치기 전날

 

들이닥쳤다고?

유달리 따뜻한 날들이 오래 가긴 했지만 입동 지나고 며칠 됐는데 뭘.

“욕심 같아서는 좀 더~”를 비웃듯 찾아오긴 했으나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봄맞이나 가을나기가 쉽지 않다고 해도 걱정하며 따로 뭘 준비하지는 않지만

겨우살이에는 채비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다가오는 겨울을 기다리는 마음은 기대보다는 걱정으로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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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닥치기 전에, 그러니까 가을 가기 전에 한 번 더! 뭐 그런 건 아니었는데

현대미술관에 간 날이 이 해의 마지막 가을날쯤 된 셈이다.

 

좋더라.

{좋지 않았더라도 좋다고 그러며 윤색하는. 그러니까 지난날은 좋은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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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실 깨끗해서 좋더라

 

 

손상기 20주기 회고전이라고 차려놨다.

한국의 툴루즈 로트렉? 아니고, 손상기.

 

자라지 않는 나무? 베였거나 죽었거나.

시들지 않는 꽃? 처음부터 생명이 없었거나 이미 말라버려 더 시들 게 없거나.

그는 서른아홉에 별세함으로써 시들지 않게 된 걸까?

피어보지도 못해서는 아니고

시들지 않음은 불멸이기도 하다는 항변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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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하운은 “사람이 아니올시다”라고 그랬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난”이라고도 그랬다.

한센(씨)병은 오랫동안 고칠 수도 없었고 천형(天刑)으로 불렸고 격리된 채 살아야 했으니까

환자의 자의식은 ‘사람이 아닌’ 존재이었을 것이다.

 

어릴 적 어떤 시점에서 구루병 같은 걸로 발육부진, 다수와 다른 체형이 되었다고 치자.

나쁜 게 올 때는 같이 오니까 평생 짊어질 다른 약점들도 많았겠고.

그게 어때서?

~라고 말할 수 없는 형편을 아닌 사람들이 알겠어?

또 병은 가난과 함께 다니더라.

병과 가난은 기회와 자유를 빼앗는다.

그러니 장애를 지닌 셈이고 ‘장애인(handicapped)’이라는 말이 그리 나쁜 말도 아닌데

부르기도 듣기도 마뜩찮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에 대한 인식과 교육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본의 아니게 실수할 수도 있고 그런데

외국에서는 특정능력이 제한을 받기 때문에 ‘person with a disability’라는 말도 사용하고

‘Differently-abled person’이라는 듣기 괜찮은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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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바이러스야 어떻든지...

듣지 못하는 데야 음악인이 될 수 있겠는가?

{진동으로 감지하는 타악기 연주가들이 아주 없지는 않다.}

보지 못하면서야 화가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키가 작다고 해서, 걷지 못한다고 그리지 못할 이유는 없다.

손이 없는 경우에조차 ‘구족(口足) 화가’라는 말도 있기는 하니까.

어렵더라도 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다.

힘들더라도 하기로 하면 하는 것이다.

 

하기 어려운 것을 해냈다고 예술에 가산점을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보기 좋고 듣기 좋다고 걸작이 되는 것인지?

‘감동’이라는 요소를 제외하고도 시청각을 편안케 해주는 것은 걸작인지?

그런 것을 반복적으로 양산해내면 대가인지?

삶과 창작활동은 분리할 수 있는 건지?

 

상품(上品)이라야 상품(商品) 되는 건 아니고

개인적인 역사가 배어나서 특별한 것들은 그만큼 귀중한 것이고.

 

두 자도 안 되는 키의 차이 때문에 ‘관점’이 다르다고 할 것은 없다.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이 소재로 채택되기도 할 것이고

담벼락, 층계, 철조망, 용신할 수 없을 정도로 들어찬 도시, 빛이 미치지 않는 음지

같은 것들이 흔히 보이는 그림세계도 있을 것이다.

시인 이성부는 ‘다 자란 어둠을 보며’라는 찬사를 부치더라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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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대해서는 뭐라 할 게 없고...

전시작품의 대부분이 ‘유족 소장’이라 해서 한마디 하는데

그 참, 어려운 살림에서도 그 많은 ‘유산’을 품고 가는 가족들이

참 장하다는 생각이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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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내 아우, 형 노릇하지 못하지만 형제 맺자고 그랬으니 그렇게 부르는데

평생 병약하여 고생하면서도 ‘문화인’ 수준을 훨씬 넘어선 키의 거인인 아우

어렵더라도 문집 하나 남기게

기원하며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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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 전시중인 그림들이야 뭐

대가니까, 걸작이니까

친숙한 것 보면 좋고

보기 좋은 것들 양산하니 대가라 인정받았을 것이고.

 

이민 짐 컨테이너에 넣어오던 박00의 조각 산산조각 났는데 나중에 가족이 찾더라고...

이상하다 저 그림 우리 집에 있던 건데 왜 여기 와 있지...

권00, 홍00, 서00... 다 어머니와 가까이 지내셨는데...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 들으니 꿀밤 한 대 놓고 싶다.

{‘재산’을 지키지 못해서는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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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전날은 최상으로 기억되기 마련인데

겨울이 ‘최악’은 아니지만

이렇게 추위가 닥치기 전

그러니까 지난주일 기온도, 하늘도, 기분도 참 좋았어.

 

이제 와서 “어제만 해도...” 그런다고 무슨 소용 있겠어?

여름의 마지막 장미도 아니고 가을 늦도록 피어있던 것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았지.

다 노래지지도 못하고 달려있던 은행잎들에게 “뻔뻔하게 아직도...” 그러며 눈 흘겼지.

얼었는데 바람 불어대니 단 한 잎도 남김없이 다 떨어졌다.

밤새 다 벗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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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그 박수근 화면이랄까 쑥돌 표면 같은 빛깔들만 보일 것이다.

염치가 있지, 첫날에 “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그럴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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