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녘
몇 해 전 포털에 블로그 한 집 짓고 나서 문 열어보지도 못했는데
문패는 ‘모연’이라고 붙였었다.
연꽃사랑(慕蓮) 혹은 저녁연기(暮煙) 쯤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募緣’이라 하여 사람들 숲에서 괜찮은 나무 하나 찾자는 건 아니고
불가에서는 시주하여 좋은 인연 맺으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신두리, 물 나간 모래밭에 기운 해가 금빛으로 부서져 내리다
영랑이 ‘가늘한 내음’에서 “애끈한 내음”과 더불어 “산허리에 슬리는 저녁 보랏빛”이라 그런 것 말이지
저물녘 산 밑 동구를 감도는 연기 있잖니
밥 짓는 연기가 싸리에 흙 발라 세운 굴뚝 타고 곧추 올라가지는 않고 고샅으로 내리깔리다가
마지못해 퍼져 올라가 산허리에 토성의 띠 같은 걸 이루는...
그때는 가난한 동네의 고단한 삶에서 쓸쓸함이 증발하는 짬이다.
저 멀리 아득히 촌집 두어 채
얼마나 쓸쓸할까 염려 되더니
저녁에 연기 오르니 따습기도 하여라
-허영자, ‘풍경’-
이상범, ‘산중모연’
저물녘이 좋은 때네, 저녁때도 그렇고 세모(歲暮)도.
허니까 섣달이라고 쓸쓸할 것도 없고 그믐쯤 되면 신나던 걸.
야호~ 이젠 올라갈 일만 남았네!
보시오 해가 져도 달이 뜬다오!
그거 소월(‘고락’)이라야 할 말도 아니고...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가만 있자, 오늘이 보름이겠네?
그러니까 평상(平常)시보다 좀 다른 게, 아주 조금만 미치고 싶기도 한 게
‘Luna-tic’이라서 ‘moon-struck’이니까.
밝고 크기로야 중추명월을 꼽겠지만 그건 좀 그렇잖니?
{정순하지 않은데 ‘정순’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는 여자 같은...}
대보름 아니라도 {그때는 너무 여럿이 즐거워하며 보니까 그도 좀 그렇다...}
동짓달 보름이면 한월(寒月)이랄 수 있겠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그런 밤 “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 할 것 아니고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할 것도 아니고
기다림이라면 황지우처럼 참하게.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 거린다.
(... ...)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