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싶다는 이에게

 

눈 내리는 밤 방안이 좋은 거지

“어느 집 질화로엔/ 밤이 토실토실 익겠다”(김용호, ‘눈 오는 밤에’) 쯤을 돌아볼 수 있고

“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최남선, ‘혼자 앉아서’)로 헛물켜고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김광균, ‘설야“)가 들리는 것 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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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에다 눈까지 내렸으니 젊은 직원들은 “TGIF!”로 환한 얼굴이 되어있지만

늙은이 나다니기에 이런 날이 어찌 좋겠는가.

아침에 흉한 꼴로 미끄러진 건 아니고 체조선수 착지 잘못하듯 엉거주춤한 정도였는데도

쓰지 않던 근육이 놀래선지 등에 아련한 통증이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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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출근길에 뿌리는 눈은 반갑지가 않다.

그래도 댓잎이 감당할 만큼 얹힌 눈이 보기 좋더라.

폐쇄수도원 채플에서 성가 부르는 수사들처럼 늘어선 나무들이 경건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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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좀 갔으면 좋겠다.

떠나지 않고서도 소풍가는 아이처럼 들뜰 수 있고

꿈의 내역은 기억나지 않고 그저 좋았다는 느낌만 남는 꿈을 연속상영으로 돌리며

주말을 홀랑 까먹는 때가 잦지만

누굴 만나러 가는 건 기쁜 일이고

알지 못하며 딛는 걸음도 괜찮다.

겨울이라고 눌러앉아있어야 하는 세상은 아니니까

가자면 어디라도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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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가벼우면 살얼음 밟으며 걱정할 것 없고

어울려 놀든지 따로 걷든지 같이 날든지 홀로 떠나든지 제 맘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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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에 있어도 더 다가서지 못하고 천년을 바라보든지

한 몸 되지 않았어도 그럭저럭 섞여 한 세월 지나든지

아주 혼자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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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홀로 있고 싶고 짧거나 길거나 홀로일 때도 있지만

서로 기대는 존재(人)이고 같이 있어(仁) 돌보고 아낌이 사는 모습일진대

獨尊(독존)이라도 獨存(독존)은 아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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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쳐나가고 싶은 건 돌아갈 집이 있으니까.

“집이 있다는 건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집이 없으면 슬퍼할 수도 없을 만큼 불행하다.

 

눈 오는 날이 좋은 건

방안에 머물면서 떠남을 꿈꿀 수 있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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