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배회
간다고 간 게 아니고 가다보니 가게 된 건데
닿은 건 아니고 숨 돌리자고 멈춘 거니까 여기가 거긴 아니고 더 나아가야겠지
점심 들고 사무실로 돌아가다가 길을 잃은 척
가만 있자 이 동네 어디 중앙박물관이 있다고 그러던데
성의 없이 턱주가리 사인으로 가리켜준 길로 가다보니
역방향이 되어 그 큰 미군부대를 뺑 돌아가게 되었어
박수근이 코쟁이 병사들 초상화 그려준 데 같은 것도 아직 남았고
골목 기웃거리니 해체하지 않은 퇴역 군함 같은 건축물들이 그냥 있더라고
폐가 앞에 서면 괜히 합장하고프던데 그게 무슨 조환지 모를 일이야
폐가 앞에 서면, 문득 풀들이 묵언 수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떠올릴 말 있으면 풀꽃 한 송이 피워 내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사람 떠나 버려진 것들 데리고, 마치 부처의 고행상(苦行像)처럼
뼈만 앙상해질 때까지 견디고 있는 것 같은 풀들
인적 끊겨 길 잃은 것들, 그래도 못난이 부처들처럼
세월을 견디는 그것들을 껴안고, 가만히 제 집으로 데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흙벽 무너지고 덩쿨풀 우거진 폐가
사람살이 떠나 풍화에 몸 맡긴 집,
그 세월의 무게 못 견뎌 문짝 하나가 떨어져도, 제 팔 하나 뚝 떼어 던져주고
홀로 뒹구는 장독대의 빈 항아리, 마치 소신공양하듯 껴안고 등신불이 되는
풀들, 그렇게 풀들의 집으로 고요히 돌아가고 있는 폐가.
그 폐가 앞에 서면
마치 풀들이, 설산 고행을 하듯 모든 길 잃은 것들 데리고 귀향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풀의 집은 풀이듯 데려와, 제 살의 흰죽 떠먹이고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김신용, ‘폐가 앞에서’-
사람 많고 살 데 적으니까 들지 못할 건 치워버려야지 그거 몰라서는 아닌데
만국공원 아래 청국 거리처럼-60년대 기억이야- 금방 무너질 것 같은 데서도 잘만 살더라고
왜들 그리 빨리 떠날까 그리고 부숴야 할까
사람 다 비운 채 반년을 버티던 그 삼층집
어제 불도저 두 대가 짜고 와서
무정하게 물고 밀어 패대기쳤다
저항하듯 일던 먼지 찬물 샤워에 진압됐고
수십 년 절은 그림자 모조리 지워졌다
그리고 오늘
낯선 증기차 한 대 기어 다니며
추억 찌꺼기 모아
트럭 짐칸 가득가득 실어 내어주고 있다
잘 가거라!
한 시절 징발됐다 딴 데로 합류하는
우리 삶의 이웃들
―이유경, ‘집 부수기’-
집을 부수는 건 새 집 짓겠다는 건데
나오는 걸 다시 쓰는 게 아니라서
한세월 지낸 건 다 폐기처분 될 거라
‘통일신라 조각전’이라는데 정원에서 시간 보내다보니 입장시간을 놓쳐버렸어
보물은 안에 있다는데 끼어들지 못한 못난이와 눈 맞추며 떨고 있었지
내가 잘 때 가슴에 두 손을 저렇게 얹고 자거든
쟤는 하늘을 지고 저러고 섰지만 난 상자에 들어가 눕듯 저러고 움직이지 않거든
정섭의 ‘難得糊塗’(난득호도, 어수룩한 척하기는 어렵다)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내가 무용하다고 잘리게 되었거든}
웬 전경들은... 하다 보니 그래 여기가 거기였구나
그렇구나 내가 이렇게 돌아온 건 여기서 시작하고는 더 갈 수 없어서였던 거구나
이제 와서 “내 그럴 줄 알았지”할 것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