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까지 갔지만
매화 보러 갔다가 동백만 보고
동짓날로부터 81일을 헤아리자면 아직 그렇게는 안 되었어도
남도 양지쪽엔 꽃망울 터졌다고 그러기에 내려갔다.
그럴 형편 안 되었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라는 마음으로 딱 하루 빼먹은 셈이었는데
잘못 골라 간 거였어.
다른 길로 돌아간 사람은 중로에서 매화를 만났다고 그러던데
버스 타고 급히 상경한 사람은 좀 허망하고 억울하네.
땅끝에 꽃이 없는 거야.
꽃바람이 한반도 최남단이라고 주장하는 데를 비켜 상륙했는가?
해거름에 법고 소리 퍼지고 암향이 떠도는... 바랄만한 거잖아?
그런 걸 기대했다고 “꿈도 야무지네” 그러지 않겠지.
매화는 그렇다고 치고 미황사 그 울창한 동백 숲에 한 점 붉음도 없는 게 말이 돼?
꽃보다 그대가 더 좋다 해도 그 ‘그대’를 만날 수 있어야 말이지.
그래도 어둠이 깃털처럼 내려앉을 무렵
품고 달래주는 기운이 조금씩 젖어들었다.
우수나 덤이랄지 거저 받은 선물이라 ‘은혜’라 그러겠네?
마냥 속상했던 건 아냐.
부처님께 인사 차리지 않고 꽃이나 보러온 이를 주지스님이 환대하시데.
달마봉은 잘 생기기도 했지만 길지도 않은 비탈길 잠깐 올라 내려다보는 경치도 괜찮더구먼.
그런데 그 땅끝 말이지, 땅 끝에 낭떠러지 있는 게 아니고 또 땅이니
‘땅 끝까지 이르러’라는 말 쓰지 못하겠더라. {지구가 둥글어서?}
오죽하면 왜군이 갈팡질팡했을까 다도해는 섬들 사이로 난 수로이지 망망대해는 아니지.
그래도 백련사 동백림은 달거리 끝날 때쯤의 혈흔이라도 있어
나름대로 위로가 되었다.
동백 몽우리가 한꺼번에 터지면 불나게? 그러지 않더라고.
얼굴 보여주기도 전에 모가지가 부러지고 시들지 않은 것들이 왜 투신하는지 모르겠어.
“‘당신도 나를 사랑하고 있군요’라는 착각을 비웃지 마셔요” 그러고 후드득 떨구는 바람에
난감해져서 발을 뗄 수 없었다.
{얘는... 사랑일진데, 일방통행이 있겠냐고?}
{옛사람은 “花落雖頻意自閑(화락수빈의자한)”이라 했는데, 내 마음은 그렇지 못하네.}
다 한 때니까
약속 못 지키는 건 신의 없어서가 아니고
지나치는 걸 잡을 수 없고 지나간 걸 되돌릴 수 없어서이지.
꽃이야 늘 있는 거지만
그때 그 꽃은 없으니까.
우련한 그리움은 지나고 나서야 정체가 드러나는데
그냥 간 건 아니고 가시 하나 박아놓았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