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동백이라니
사랑이 사람을 바쁘게 하는 건 아니지만
사랑하는 동안에는 할 일 다 못하는 거니까
사랑이 주춤할 때 정신 차리고 보면 뭣부터 손댈지 모르게 쌓였는데
익명의 독자들과 마음줄 이어가는 건 순위에서 밀리게 되니까
꼬박꼬박 블로그질 하는 게 쉽지 않더라고.
그러다가 평지돌출인가 군계일학처럼 빼꼼하니 고개 드는 존재가 생기면? 에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그럴 수도 있다는 개연성... 행을 붙여 짐짓 산문을 만들고.}
꽃샘추위니 이상고온이니 하는 것도 정상의 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해본 사람이 하는 말 “처음엔 다 그런 거니까”처럼 봄은 다 그런 것이고
변수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봄 온지 오래 되었잖니.
달력 보고 “아 춘분이네” 그러기 전에
젖꼭지 부풀듯 일어난 아기진달래 봉오리들 출근길에 보았지?
회화나무 아래서 노랑봉지를 터뜨리는 가지를 보며
“수피가 원균 할아버지 손처럼 엉망으로 거친 건 산수유, 생강나무는 꽃이 모여서 피니까 저것은...”
그러던 적이 금방 지나갔는데 까마득한 옛날 같구나.
이제 와서 남도 동백 얘기 꺼내는 게
작년 추석에 먹은 송편이 어떻더라는 얘기 같이 되었다만
하룻길 남도 나들이의 기억이 가라앉았던 앙금 떠오르듯 하네?
새것을 발견한 신기함에 뭘 모르고 사진 몇 장과 더불어 여행기 엮어 올린 걸 두고
토박이라고 지나가는 이들의 호들갑을 우습게 여길 건 없지만
낳고 자란 사람들이 동네 맛집이나 외지인의 눈에 띄지 않는 경치를 잘 알지 않겠는가.
백련사 동백 숲은
깊은 바다
(김재석, ‘동백 바다’)
백련사 동백 숲은 대낮에도 어둡다.
(김선태, ‘백련사 오솔길에 들다’)
에, 뭐 그 정도야 누구라도 다 알고 아무라도 쓸 수 있는 얘기지만
김선태, 김재석은 강진 촌놈들이니까
그게 말하자면 동네자랑 같은 건데
다산이 차 한 잔 얻어 마시러 넘어가던 고갯길
“특별히 좋다 할 만한 경치도 아니구먼 뭐...” 그러다가
동백 숲에 들어가니까
정말 어둡더구나, 풍덩 빠져 심해의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대.
다 피지 못한 꽃들은 무슨 사연으로 투신할까?
밤새 어디선가 아무도 모르게 목매는 이 늘어나던데
눈부신 것 앞에서는 담담하고 당당할 수 있어도
가냘픈 것 가녀린 것 꺾어진 것 떨어진 것 보고서는 제 잘못인 것 같고 제 죄가 생각나서
그냥 가지 못하는 사람인데
감춰진 죽음들 목격했다고 일일이 조의를 표하기도 그렇더라.
그리움으로 자신을 잊은 때가 가장 기뻤던 시간
그러니까 슬플수록 좋았던 셈이고
지금 아픈 건 그동안 즐거웠기 때문이지.
그가 내게 아픔을 준 게 아니고 내가 그냥 아파한 거지만
내가 아픈데 그가 아프지 않은 게 서러워서 더 아파지는 건
어쩔 수 없네?
단순, 과격, 무식쯤 버무리면 그런 작품이 나오는 건지
무모하게, 계산 않고, 방비 없이 덤비다가
가진 것조차 다 잃어버리고
얻은 게 있다면 욕심이지
실속 없는 사랑이 사랑이지
그러며 쿡쿡 웃다가
어쩌지 못해 품고 있는 재회의 소망이 가시가 되어
가슴을 쿡쿡 찌른단 말이지?
땅 끝 가까이 놓인 미황사도 많이 노출되어서
이제는 숨겨진 여인이라 할 수 없는데
조강지처 몰래 한눈팔아도
죄가 되지 않을 기회가
생애 딱 한번 주어진다면
곧장 달려와 너를 껴안으리
아니 네가 허락만 한다면
지금 당장 죄라도 짓고 싶구나
(김재석, ‘미황사’)
웬일인지 그 날 미황사에서는 동백 보지 못했고
아직 흙색깔뿐인 꽃밭에 수선만 달랑 솟았더라고.
하늘 향해 주먹질하는 걸 지켜보다가
피곤한 얼굴에 즐거운 주름 하나 더 얹혔지.
아 좋은 봄날 TGIF! 나 지금 뭐하고 있는가?
사랑은 자기파괴니까 동백처럼 죽도록 떨어지지 뭐.
떨어진 만큼 봉오리 맺으며 죽을 때까지는 살지 뭐.
사랑하는 사람들은 화 내면 안돼, 달랠 수 없으면 마냥 기다리는 거지만
그렇게 가버린 시간은 어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