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중간에 잠깐 바닷가를 들리긴 했지만
휴가를 즐긴 것도 아니고
해야 할 일 하는 김에 흩어진 식구들 보고 온 셈이다.
홀로 산길 걷다가 듣는 꾀꼬리 소리, 발길 멈추고 허리 숙이게 하는 솔나리처럼
중간기착지에서 불러보고 싶은 이름, 듣고 싶은 목소리가 있다.
떠돌이별이 지구에 가장 가까워지는 주기만큼?
한반도에서 개기일식을 다시 볼 수 있는 때까지?
아무리 길어도 예측가능하면 기다리기가 낫다.
광복군 연락책이나 북파공작원처럼 나타나야 살아있는 줄 비로소 알게 되는 이를
그것도 사랑하는 건지, 그러면 죗값을 물어야 하는 건지
정화수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그러기를 십 년
뭘 비는지 몰라 황당한 기분으로 “이게 뭐지? 그만 둘까?” 그러던 날, 하필 그 날
발신정보 없는 신호에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수화기 들었는데
아무렴 그 소리 잊으랴
격렬한 두방망이질로 졸도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그간 잘 계셨어요? 아프지나 않으셨는지...” 그러고는
무슨 말을 더 했던가? 아마 “그럼 몸 성히...” 정도, 그것도 입속에서 우물거렸을 것이다.
그렇게 소리 한번 들으면 된다.
만나서 더 좋을 게 뭔지 본 적 없어 모르지만
보지 않은 사람 사랑한다는 게 말도 되지 않아 누구에게 그런다고 일러주지 않았다.
소식, 사라질 消 쉴 息?
한자를 사용하자면 성문(聲問), 풍신(風信)이 차라리 고개 끄덕여지는 말이기도 한데
그래도 ‘소식’이 ‘알림’으로 순화되었다니 괜히 서운하다.
국화꽃 피면 더욱 기다려지는 집 나간 자식 소식,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로 나갔더니...
그런 ‘소식’의 용례 때문에
갑자기 가슴에서 쏴아 소리가 나는 거야.
Malibu Beach에서 Dana Point에 이르기까지 한적한 데 찾기 힘들지만
그래도 해 떨어질 무렵 파도 밀려오면
그 많던 사람들 다 사라지고
그 목소리만 들리는 것 같다.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만났으면 먹고 헤어져야 하니까
아들과 그저 그런 불란서 식당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맛있는 Crepe 먹고 나왔다.
만날 이들 만나고 못 본 이들 그래도 남는 여행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