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대루에서
찬비 내리고 나면 “가을은 깊었네” 그런다.
空山新雨後 天氣晩來秋 (王維, ‘山居秋暝’ 中)
가자고 끌려갈 것도 아니고 붙잡는다고 멈출 것도 아니고
맑은 바람 불어오면 내키는 대로 거닐면 되겠다.
{逍遙徜徉 惟意所適 明月時至 淸風自來 行無所索 止無所柅 (司馬光, ‘獨樂園記’ 中)
빼어난 경치로 알려지지 않은 산에 오르고
아무렇지도 않은 산길을 홀로 뚫기 좋은 날들이다.
{淸凉山이 듣고는 섭섭하다고 할 얘기.}
움직일 때는 구름 같고 멈춰서면 산 같은.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지향사격에 뭐라도 하나 맞아주기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늦었지.
늦었더라도 아주 늦지는 않아 더러 운명처럼 만난 늦동무(晩交)도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두 해 내리 가물어 봉화에서 ‘송이 축제’도 열지 못했단다.
뿌리 깊은 나무라 그래도 살아남은 왕버들 아래 낙동강 자락도 말라버렸다.
그대가 앉았던 자리는 그대를 기다리는 자리가 되었는데
이제는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하누나” 라고 할 수 없는 나이인지라
우리 이제 오해로 헤어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묵은지 유통기간은 묵은지 맛 날 때까지.
사랑의 유통기간? 표기할 수 없겠네.
진한 양념에 끌렸다가 뒷맛 나빠진다든지 그러지 않으면
갈 때까지 가면서 곰삭아서 오히려 좋기도 할 것이다.
날것이라면 배추전처럼 심심한 게 낫겠다.
푸른 스크린(翠屛) 저물녘 마주하기 좋아서 ‘晩對樓’라 했다니 그런가보다 한다.
晩자, 혹은 暮자, 눈에 들어오기만 해도 빈 고동에서 나는 쏴~ 소리 같은 것이...
기운 볕 갈댓잎에서 반짝일 때쯤을 暮色 혹은 晩景이라 하고
초원의 빛, Splendor In the Grass를 晩暉라 하겠고
그때쯤 공연히 슬퍼지면(暮思) 기도(晩課, 晩禱)해야 할 것이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엘리트 제자들 모아 講學에 열심이었던 西厓의 가슴에는 그런 생각들지 않았을 것이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틈이 없으니까.
克己復禮라 復禮門이라 했겠다.
백일 붉었던 배롱나무 꽃 간데없지만
초록 지칠 때 되니 더 나아 보인다.
통시조차 멋지다
유홍준 제멋에 겨워 찍찍 날렸던 글로
도로포장이 안 되어 잘 보존되었다던 병산서원이 나 같은 무식쟁이조차 찾는 코스요리에 끼어들게 되었다.
음악은 Brahms, 4 Gesange, Op. 43: No. 1. “Von ewiger Liebe” (Rosa Ponselle)
고릿적 노래니까 저작권 분쟁 없으리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