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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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 보고 세 번 놀란다는데

“그럼 모과가 모과지” 그러는 건 흉보자는 얘기.

아, 문태준! 세 번 놀라고 나서

“문태준이 문태준 아니고 뭐겠냐”로 적이 안도했다는 사실.

참, 참, 참! 안팎이 같은 숫보기, 알짜, 참꾼이구나.

 

정복자로 개선하는 나폴레옹을 보며 “저기 ‘세계정신’ 지나간다!” 그랬다는 헤겔

케네디 대통령을 바라보는 소년 클린턴의 눈에 담긴 敬慕

웃기지도 않데.

영웅숭배에 빠진 적 없었지.

이제 와서 그를 두고 ‘詩聖’이라 하겠는가?

詩가 말(言)의 절(寺)이고 보면

그래도 그는 그런 사원의 부지런한 園丁인 건 틀림없으니

祇園을 가꾸는 자라면 高僧大德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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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없이 문학상들을 독식하고서도

제가 무슨 히딩크라고 “아직 배고프다”는 표정으로 섰는가?

하긴 그는 “새벽길 삼백 리를 달려온 찌그러진 작업화”(신경림, ‘찌그러진 작업화’)이고

“산서성의 나귀처럼 걸어온 나”(‘극빈 2’)니까.

‘극빈’ 시리즈는 1, 2, 3에 머무르지만, 말리지 않으면 ...N에 이르겠네.

 

춥고 배고파 보임을 흉볼 것도 아니고

피하고픈 가난이나 견뎌야 할 가난 아닌 택한 가난, 즐기는 가난은

자랑스러운 가난이기도 한데

뻐기지 않으면서 은근히 권고하는 것이

아시시의 프랜시스 수준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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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 매수로 값을 치던 시절에 詩作은 할 짓이 아니었다.

그래도 받아주는 데만 있다면 설사 만난 듯 쏟아낼 수 있을까?

그게 맘대로 되나, 끙끙대며 파지만 만들어내던 목월이 그런 시를 남겼다고 한다.

 

    써도써도 가랑잎처럼 쌓이는

    공허감.

    이것은 내일이면

    지폐가 된다.

    어느 것은 어린것의 공납금(公納金).

    어느 것은 가난한 시량대(柴糧代).

    어느 것은 늘 가벼운 나의 용전(用錢).

    밤 한 시, 혹은

    두 시. 용변을 하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아래층은 단간방

    온 가족은 잠이 깊다.

    서글픈 것의

    저 무심한 평안함.

    아아 나는 다시

    층층계를 밟고

    이층으로 올라간다.

 

       -박목월, ‘층층계’ (부분)-

 

 

매듭달 어느 무날 그의 시 낭송회가 있다는 데를 일부러 찾아갔다.

글벙어리 모아 놓고 적당한 격려의 말씀을 베풀리라 짐작했지.

무슨 말솜씨가 그래, 그런데 그 어눌함이 그렇게 편안할 수 없는 거야.

제 시 네 편인가 읽긴 했지만

{작곡가가 가수 아니듯 그야 아무래도 괜찮았고}

무슨 詩論이랄 것도 아니고 “뒤늦게 시를 공부하며 신경림 선생님께 들은 얘긴데” 그러면서

劉廷芝(유정지)의 ‘흰 머리 노인을 대신하여 슬퍼함(代悲白頭翁)’을 조금 인용하기도 했다.

“고운 눈썹 아가씨는 언제까지 아리따우랴 잠깐에 흰머리가 실처럼 흩을 것을.”

(宛轉蛾眉能幾時 須臾鶴髮亂如絲)

 

{할 말은 아닌데} 에이 장가 일찍 갔으면 그만한 자식이 있겠네만

그는 첨부터 애늙은이였다니까. 해서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까지 읊더라.

그야 꼬부랑 할머니 아니라도 이팔청춘 아닌 담에야 정서가 다 그럴 것이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설워마라

    명년삼월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우리 인생 한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그게 다 사람 맘대로 생각이지

꽃은 열흘 붉지만 사람은 고희 지나서도 벌 나비를 부르던 걸.

또 그렇지, 한잠 자고나면 봄일 것을.}

 

{그러고 보니 김정식은 고작 서른두 해를 살고 윤동주는 스물일곱을 겨우 넘겼으니까

불혹에 이른 그를 두고 젊다 할 게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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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얼마 전에 가신 신현정 님의 ‘사루비아’, 그 옛적 윤석중 님의 ‘겨울 엄마’도 꺼냈다.

시인이 착해야 되는 건 아니지만

동심이랄까 순전함은 지녀야 한다는 얘기로.

우리야 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씀 잘 아니까.

 

삶은 치열하고 욕망은 처절하지만

지독한 언어를 고를 건 없다.

사루비아, 수혈을 부탁해?

조용히 건네셨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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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이현섭

 

 

 

그리고 집안 얘기를 했다.

가난과 미신과 아버지, 큰 어머니, 다른 식구들.

 

지게를 집에 기대어 받쳐두면 혼이 났다나.

집이 지게에 실려 어디로 가면 안 되니까.

지게는 큰 허공을 지고 집을 바라보듯 두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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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자라 집에 그늘을 드리면... 볕바른 것보다 좋기야 하겠는가

해서 고염나무를 베고 단면에 소금을 뿌렸는데도 죽지 않더라는 얘기.

거기서 나온 시가 ‘그늘의 발달’이다.

 

    감나무 그늘이 지붕을 덮는다고

    감나무를 베는 아버지여

    그늘이 지붕이 되면 어떤가요

     (... ...)

    우리는 그늘을 앓고 먹는

    한 몸의 그늘

    그늘의 발달

    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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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바른 게 좋지만 그늘이 아주 안 들면?

거기는 사막.

양지에서만 지내는 사람들은 메마를 수밖에 없지.

좋다는 골프장에도 군데군데 그늘집이 있더라고.

 

사람, 사랑, 인연... 응시하면 다 그늘이 드리웠더라고.

행복하지 말자는 게 아니고 늙어감, 아픔, 헤어짐, 이 추위... 그런 걸 인정하자는 얘기.

고통과 이별은 당사자의 악의나 실수가 초래한 게 아니고

만남과 기쁨 따위에 내장된 프로그램이랄까 생성과 더불어 발동하는 바이러스 같은 거라고.

 

맞으면서도 꾹 참으라는 얘길까, 아니고

그만한 무게로 지는 자루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자루는 뭘 담아도 슬픈 무게로 있다

    {... ... 슬슬 지루해져 몸통 다 떼어내고}

    보리질금 같은 세월의 자루를 메고 이 새벽 내가 꿔온 영원을 다시 생각하오니

 

    -‘자루’ (부분)-

 

 

끝나기 전에 나오면서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는데

등 뒤에서 성호를 그어 축복하고 있는가 그런 상상으로

조금 움츠리게 되었다.

해본 적이 없으니 그건 아닐 테고

“내 혼을 가장 부드러운 살로 핥아주시던”! (‘혀’)

그건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제관일 뿐만 아니고 위로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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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 있는 데서 손들어 질문하기도 그랬는데

그의 시에는 왜 하얀 모래밭이 아니라 뻘만 있는지

그 ‘뻘’이라는 말이 발표된 시들에서 몇 번이나 나왔는지?

그리움조차 ‘뻘 같은 그리움’이라 했다.

“그립다는 것은 조개처럼 아주 찬찬히 뻘 흙을 토해내고 있다는 말”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그렇게 찬찬히 살아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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