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泥鴻爪 (설니홍조)
눈이 오는가 북쪽엔?
백무선 철길까지 떠올릴 것 없다, 서울이 지금 그러니까.
이 정도를 두고 무슨 ‘눈폭탄’이라 하는가
아 모레알(Montreal)에서는 눈치고 다니는 게 정말 큰일이었다.
그래도 이만큼 쏟아진 게 얼마만인지...
이제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그런 정서 없거든.
이런 날 미인이 불러내도 나가지 않겠다고 그랬더니
“그러니까 내가 데이트를 신청해도?”로 나오는 아내.
에이, 골다공증이라면서 부서지면 어쩌려고...
웬 연기자의 수상소감, 그건 백범을 인용, 그건 휴정선사 남기셨다는 말씀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 덮인 들판 걸어가더라도 발길 어지러이 하지 말지니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취 뒷사람들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기에.
비틀걸음에 헤맨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질 건 없다.
따라오든지 아니면 제 길 따로 내든지 제 몫이니까.
게다가 눈 녹은 자리엔 발자국 남지 않을 것이니
그건 나처럼 눈 밝지 않은 사람에겐 큰 위안이다.
사람들은 저서가 있냐고 묻는다.
명성, 학위, 경력 아무 것도 없는 이에게 인사차 하는 소리.
벽이 무너져 그때 끼적인 낙서 보지 못하게 됐다(壞壁無由見舊題)고 그런다.
만리장성이니 대운하니 하며 토목공사로 ‘불멸’을 이루려는 못난이들 때문에 내가 못살아.
남기긴 뭘 남기겠다고.
뒤창에 눈 그쳐 눈길을 걸어갔네
나를 앞서 이 눈길을 간 발자국들이 있네
어떤 걸음은 꽃창포가 핀 것 같네
어떤 걸음은 짧은 화살을 찍으며 머뭇거리다 나아갔네
발가락 사이가 비좁은 네발 짐승도 뒤따라갔네
종주먹을 들어 을러대며 뒤따라갔네
이것은 살가죽을 두드리는 비릿함이 있네
살찐 나는 네 번째로 이 길을 걸어갔네
바락바락 문질러놓는 소리가 나네
넷이서 서로 뒤따르며 눈길을 걸어갔네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어갔네
살얼음이 있는 동안만 반짝이는 것이니
잠시 망설일 뿐 순백의 시간 속으로 사라져갔네
어느 것 하나 돌아나오는 발자국이 없네
문태준, ‘넷이서 눈길을 걸어갔네 -설니홍조(雪泥鴻爪)’
눈발이 잦아드는 것 같은데 한번 나가보기는 해야 될 것 같다.
이제 나간다면 발자국 찍음에 부담 될 일도 없고
춤추듯 날리는 눈송이 잡으려는 듯 손 내미는 시늉 한번 해보면 되겠다.
나비 따라가는 아이가 굳이 잡으려고 그러겠는가, 그러며 봄기운 들이마시는 것이다.